용소막 성당
관리자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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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1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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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막 성당은 1904년 강원도에서
풍수원, 원주(현 원동 주교좌)에 이어 세 번째 본당으로 설립되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무렵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용소막 인근에 흩어져
살다가 1893년부터 용소막으로 한두 집씩 이사 오고, 당시 전교회장으로 활발한 전교활동을 하던 최도철 바르나바까지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습니다. 교세가 커지자 시잘레 신부는 성당 신축에 나서 착공 3년만인 1915년 가을에 100평 규모의 아담한 벽돌 양옥 성당을
완공하였습니다. 일제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성당 또한 많은 수난을 겪었지만 다행히도 원형을 거의 보존할 수 있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6년에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성당 구내에는 본당 출신으로 공동번역 성서 발간에 큰 업적을 남기고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한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의 동상과 유물관이 있습니다. 또한 피정의 집인 두루의 집과 교육관이 있고, 100주년을 기념하며 성당 뒷산에 마련한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도 있습니다. 한편 성당 건립 100주년을 앞두고 정부 지원과 신자들의 정성으로 낡은 성당에 대한 문화재 보수작업을 진행해 2014년 10월 성당복원 완공 감사미사를 봉헌했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10:00 | 교중미사 |
| 평일미사 | 월 | 06:00 | |
| 화 | 20:00 | ||
| 수 | 06:00 | ||
| 목 | 20:00 | ||
| 금 | 06:00 | ||
| 토 | 20:00 | 특전미사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원주교구
소속 본당.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용암 2리 719-2 소재. 1904년 5월 원주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분리 ·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 관할 구역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전 지역과 충북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관할 공소는 황둔, 학산
2개소.
본당
설립과 발전 당시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백낙훈이 신부가 사제관으로 사용할 집 한
채를 마련하자 최도철 회장은 용소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원주 본당에 청원하였다. 그러자 원주 본당의 르 메르 신부는 이웃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鄭圭夏, 바오로)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여 뮈텔 주교에게 건의하였고, 마침내 1904년 5월 4일 뮈텔 주교가 이 건의를
허락함으로써 용소막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는 1903년에 입국한 프와요(V. Poyaud, 表光東) 신부가 임명되었다.
프와요 신부가 부임할 당시 신자수는 864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관할 구역은 원주군, 영월군, 평창군, 제천군, 단양군 등 5개 군에 걸쳐 있고
사방 3백 리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프와요 신부가 최도철 회장, 선병로 회장, 최도철 회장의 셋째 아들 최영식(바오로) 등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전교한 결과 수년 후에는 교세가 1,000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1910년 프와요 신부가 서울로 전임될 때에 이르러 용소막 본당은 교세가
1,238명에 달하는 큰 본당으로 발전하였다.
시잘레
신부는 그 해 가을에 묘재(山尺, 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공소의 이석연 회장의 알선으로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공사를 담당하게 하는
등 성당 신축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장티푸스에 걸려 앓고 있던 최도철 회장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모든 신자들이 적극 나서서 성당 신축
공사의 일을 열심히 도운 결과, 착공한 지 3년 만인 1915년 가을에 100평 규모의 아담한 벽돌 양옥 성당을 완공하였다. 이 새로 지은 성당
지붕의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게 된 것은 당시 건축 기술자였던 중국인이 도면대로 짓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기둥의 길이를 2자씩 잘라내고 지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총신자수는 2,081명에 달하였다. 6대 주임으로 부임한 백남희(白南熙) 베드로 신부는 1938년 봄에 학산 공소의 강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0대
주임으로 부임한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 때는 6.25 전쟁이 발발하여 본당이 크게 피해를 입었다. 성당은 공산군들의 식량 창고로
전락되었고, 성당 내부의 성모상이 총탄을 맞아 목과 전신이 파손되었으며, 성당 천장도 총탄의 세례를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아울러
명덕국민학원 교사와 본당 사목 문서도 모두 불에 타 버렸고, 회장들이 공산군들에게 끌려가 숱한 고초를 당하였으며, 일반 교우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성당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게 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1983년
5월에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신부들이 원주교구에서 철수함에 따라 이후부터는 한국인 사제들이 본당의 주임을 맡게 되었다. 28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태원(金泰元) 요한 신부는 1984년에 성당 내부를 수리하고 성당 지붕을 동판으로 교체하였으며, 1985년에는 초가집을 구입하여 피정의
집인 두루의 집으로 개축하였다. 아울러 1986년 7월에는 수녀원을 건립하여 성모 영보 수녀회 분원을 마련하였고, 도농 간의 나눔의 공동체
실현을 위해 서울교구 소속의 길동 본당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또한 1987년 10월에 남상교(南尙敎)의 후손과 미아 3동 본당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학산 공소 강당 옆에 있는 남상교 유택의 지붕을 기와로 교체하고 뒷산에 14처를 조성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는데, 남상교는 성인
남종삼(南鍾三)의 부친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꽃당이(현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에서 이곳으로 이사와 살았던
인물이다.
29대
주임으로 부임한 곽호인(郭鎬仁) 베드로 신부는 1990년 12월 가리파 공소가 중앙 고속도로 건설 부지에 편입됨에 따라 이를 폐쇄하였으며,
1991년 4월에 황둔 공소의 강당을 이전 · 신축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아울러 1994년 4월에는 남상교 유택을 수리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 소방도로 개설로 인하여 신림 공소 건물을 철거하였다. 31대 주임으로 부임한 남궁민(南宮玟) 루카 신부는 피정 센터인 두루의 집을
보수(1, 2층) · 증축하여(3층) 축복식을 거행할 뿐만 아니라 성당의 전기 시설을 수리하고, 음향 시설을 교체하며, 마루와 창틀을 보수하는
등 본당의 시설물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단행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