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원머리(신평 한정리)

Korea Martyrs Shrine 한국의 순교 성지

당진 원머리(신평 한정리)

관리자 0 6643 0
 간략설명 원머리 출신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지번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233 
 전화번호 (041)363-6761
 팩스번호 (041)363-6764
 홈페이지 http://www.sinpyeongcatholic.or.kr
 관련기관 신평 성당    
 관련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신평길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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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현양비.대전교구 신평 성당 관할 구역인 원머리(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는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두 분 순교자의 묘소가 있는 성지이며 초창기 박해 시대 때 많은 교우들이 피신하여 정착한 교우촌 지역이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 원을 막는 머리 부분이라는 뜻을 지닌 ‘언두리’가 원머리로 변형된 말이다. 이곳에는 1784-5년대 이존창 루도비코에 의해 주변 내포지역과 함께 삽교천 물줄기를 따라 신앙이 전해져 왔고, 그 당시 충청도 관찰사인 박종악의 수기(1791-2년)에 의하면 1790년대에 이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원머리 지역은 아산만의 물줄기와 삽교천 하부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며 당시 밀물이 들어오면 사방이 바닷물로 둘러싸여 자연적으로 섬의 모양을 띄게 되었다. 따라서 천혜의 요지인 이곳으로 박해를 피해온 많은 교우들은 주로 염판(불로 바닷물을 지펴서 증유하여 소금으로 만드는 작업)과 옹기그릇을 구우며 생계를 유지했다.

오늘날 이곳은 제방과 둑을 쌓으면서 논과 밭이 만들어져 과거의 역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공소들뿐이지만,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를 잘 엿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교우촌 지역이다.

1929년 초창기 원머리 순교자 묘.현재 남은 것은 공소의 허름한 건물들뿐이지만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장한 순교자들과 이런 오지에서 오랫동안 오고가는 사람 없이 황량한 바닷바람과 관아의 눈을 피해 살아온 많은 교우들의 삶의 흔적이 시대의 한파와 변화 속에서 그 참된 가치가 묻혀왔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성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었고 그 해 전대사 성지로 선포되었다.

순교자 박 마르코의 아우 박 요셉은 1920년대에 형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르코 형은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모친과 함께 동네 교우들과 연락하고 지냈다. 신부님이 오시어 성사를 받으려 하면 부친이 금하는 고로 이를 마음속으로 꺼리더니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잡혀 갈 때 그는 부모에게 하직하며 위로하되 거기 가서 죽으면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 만은 주 명대로 위주하여 죽는 것이 구령에 편한 일이라, 부디 염려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한 다음 그의 사촌 형 박 마티아와 함께 수원으로 붙잡혀 끌려갔다.

모진 고문을 당할 때 사촌 형 박 마티아가 매를 못 이겨 배교하자, ‘천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어떻게 받으려 하느냐?’고 했고, 이에 박 마티아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15일 후에 같이 순교했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외교인 서덕행이 모진 매를 맞아가며 시신을 찾아 이곳 원머리로 운구하여 가족에게 넘겼고 현 묘역에 안치했다고 한다. 이때 박 마르코의 나이는 33세였고 박 마티아의 나이는 52세였다. 이후 서덕행은 순교자 박 마르코의 매제가 되었고, 사후 그의 공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순교자 묘역 옆에 안장하였다.

2016년 현재 원미리 성지 모습.원머리의 신앙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순교자들의 무덤이다. 1868년 수원에서 순교한 두 분의 시신이 다행히 이곳 박씨 집안의 야산에 묻혀 큰 변고 없이 내려왔고,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묘를 관리해 왔기에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 이렇게 보존된 두 순교자의 유해는 1989년 신평 성당 구내로 이장되었다가 2009년 본래의 진토가 있던 원머리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 사이 원머리 묘역에는 순교자 유해가 없었음에도 빈 무덤을 보존하고 있었기에 원형을 회복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이 땅이 교구에 기증됨으로써 명실상부한 교회 공동체의 유산이 되었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내려오는 순교자 묘로서의 가치를 지닌 유명한 성지가 되었다.

이 묘는 2009년부터 한국 교회에서 진행 중인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의 제2차 시복 추진으로 인해 그 가치가 더 주목받게 되었고, 2013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안건의 제목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로 변경해 그해 4월 26일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예비심사 관할권 승인 교령을 받은 2차 시복 추진에 원머리 출신의 두 순교자가 대상자로 포함되어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출처 : 신평 성당 제공,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6년 9월 5일)]


신평 성당의 관할 구역인 원머리(당진시 신평면 한정리)는 성당에서 북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이미 상당히 큰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 원을 막는 머리 부분이라는 뜻을 지닌 언두리가 원머리로 변형된 것으로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이 염판과 옹기그릇을 구우며 살던 교우촌이었습니다. 이곳에도 박해의 광풍이 몰아쳐 1866년부터 1868년까지 3년여에 걸친 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는데, 원머리에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는 무진년(1868년)에 수원 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사촌지간인 두 형제의 순교 후 그들의 시신은 외교인 서덕행에 의해 고향 원머리의 박씨 집안 땅에 안장되었다가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 구내로 옮겨 모시며 현양비를 세웠습니다. 신평 성당은 2000년 새 성당을 건축하면서 두 순교자의 묘를 재정비하였고, 2009년 11월 3일 순교자 현양과 성지 개발을 위해 본래 두 순교자가 묻혔던 원머리 묘역으로 유해를 다시 이장했습니다. 그리고 현양비도 수정하여 다시 세우고 묘역 또한 재정비했습니다. 아울러 20여 년간 두 순교자가 모셔져 있던 신평 성당 자리에 기념비를 세워 두 순교자의 믿음을 기리고 있습니다. 두 순교자는 현재 한국교회에서 진행 중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추진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미사시간
미사구분 요일 시간 기타사항
주일미사 06:00  
10:00  교중미사
평일미사 06:00  동절기 미사 없음
19:30  동절기 19:00
10:00  
19:30  동절기 19:00, 매월 첫 목요일 원머리 성지 도보순례
10:00  
18:00  주일미사(어린이 미사)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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