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관덕정
관리자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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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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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관덕정(觀德亭)은 조선 시대 무과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都試廳)으로 영조 25년에 세워졌습니다. 관덕정 앞마당에 자리한 연병장에서는 무과를 위한 활쏘기와 말타기,
세시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도 행해졌습니다. 관덕정이 천주교와 연관을 맺은 것은 연병장 가장자리인 아미산 처형장에서 천주교인들이
순교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중죄인으로 취급됐던 천주교인들은 박해 때마다 이곳에서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선조 34년에 경상도
감영이 대구에 설치되면서 경상도 전역의 교우들이 대구로 이송되어 감영에서 옥사하거나 처형장에서 순교했습니다. 이렇게 관덕정과 감영 등 대구
지역에서 순교한 20위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관덕정이 순교성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순교자 이윤일 요한이 시성되면서부터입니다. 대구대교구는 사형 터로 고증된 부지를 확보하여 1985년 순교기념관 기공식을 시작으로 1991년 1월 20일 지하경당 축복식과 이윤일 성인 유해 이전 봉안식을 갖고 그해 5월 31일 개관하였습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식 누각으로 당시 관덕정 모습을 재현한 순교기념관에는 이윤일 성인의 유해와 함께 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 그리고 영남 지역 교회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연간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덕정 순교기념관은 순교정신을 함양하고 신자들의 신앙 재교육과 선교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2년부터 매년 ‘성 이윤일 요한제’를 기획 · 거행하고 있습니다. 2002년 1월 21일에는 기념관 입구에 대구대교구 제2주보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의 동상을 세웠고, 2007년 1월 21일 기념관 바로 옆에 신관을 신축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회의실과 강당 등을 갖춘 신관은 순교신앙 학습의 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평일미사 | 화 | 10:00 | |
| 금 | 15:00 | 순교자 현양미사 | |
| 토 | 17:00 | 주일미사(매월 첫째 토요일은 후원회원을 위한 미사)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대구
관덕정(觀德亭)은 조선 시대 무과 시험제도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都試廳)으로 조선 영조 25년에 세운 건물이다. 옛 이름은
관덕당(觀德堂)이었다.
그리하여
박해 때마다 경상도 전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대구로 이송되어 와서 감영 옥에서 옥사하거나 형장에서 순교를 하게 된 것이다. 관덕정과 대구 인근에서
순교한 교우의 수는 지금까지 모두 25명, 감영 옥에서 옥사한 순교자는 30명으로 추산된다. 이들 중에서 20위(울산 장대 순교자 3위 포함)가
대구지역 순교자로서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도시청(都試廳)으로서의
용도가 필요 없게 된 1906년, 대구 유지들이 의연금을 모아 관덕정을 수리하고 경상북도 교원 양성소인 사범학교를 개설했으나 폐교됐고 해방 후
완전히 헐렸다. 일제 시대에는 관덕정 마당에 동문 시장의 일부가 옮겨와 새 장터 또는 남문 시장으로 불리다가 1937년 남문 시장이 옮겨 간 후
현재의 모습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老萊山, 청송군 안덕면 노래 2동), 진보 머루산(영양군 석포면 포산동), 안동 우련밭(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교우촌 등에서
체포된 신자들은 주로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피해 경상도 산간 지역으로 숨어든 초기의 교우들이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 은거지를 찾던 중에 교우들을 만나 비밀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그 안에서 교리를 외워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다. 그러다가 탐욕스런 밀고자 때문에 체포되었고, 신앙을 끝까지 지킨 김종한(안드레아) 등 7명은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은 뒤 관덕정
앞에서 칼날 아래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교우들은
시신을 옮기는 일을 인근 주민들에게 들킬까봐 걱정을 하였다. 그 때 천주의 특별한 보호로 시체들이 묻혀 있는 읍내 쪽이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였다. 하늘은 내려앉은 듯하였고,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겨우 일꾼들이 일할 수 있을 만큼만 빛을 발하였다. 최성렬(바르바라)의 시체만 짐승이
파먹은 듯하였으며, 나머지 6구의 시신은 조금도 썩지 않아 숨을 거둔 지 얼마 안되는 것 같이 보였다. 무덤을 파헤쳤을 때 나던 냄새도 땅
밖으로 시신을 끌어내자 이내 없어졌다. 옷가지도 잘 보존되어 있었고, 습기는 차 있지 않았다. 이를 본 모든 교우들은 감탄하였다("한국
천주교회사" 중, 82-83면).
1866년
10월, 문경 관아에서는 여우목 교우촌의 실상을 알아내고는 포졸들을 보내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포졸들이 마을 어귀로 들어서자 요한은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하였고,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문경을 거쳐 상주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러던 중에 수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요한의 마음은
오히려 굳어져만 갔으며, 상주 목사는 그를 천주교의 두목으로 지목하여 대구 감영에 보고한 뒤 그곳으로 압송하였다. 이 때 그는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날 것이다.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 성실하게 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런 다음 나의 뒤를 따라오너라."
하고 당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