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유스티노 신학교
관리자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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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1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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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대구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 주교는 주교관 · 신학교 · 주교좌성당의 증축이 이루어지면 루르드 동굴과 유사한 동굴을 세워 성모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때부터 신학교 설립은 교구의 가장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상돈이 기증한 부지에 신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드망즈
주교는 세계 각지에 재정 지원을 호소했고, 그 결과 1912년 성 유스티노를 주보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25,000프랑을
기증받아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1914년 10월 3일 개교한 신학교는 기부자의 요청대로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명명하고,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7명의 대구 대목구 소속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7명을 받아들여 1918년 첫 출신 사제를 배출했습니다. 사제양성 교육기관으로 꾸준히 성장하던 신학교는 일제에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1944년 12월 23일의 서품식을 끝으로 이듬해 3월 19일 폐교되었습니다. 신학교의 건물과 부지는 1945년 3월 31일 일본군 제218 부대에 징발되었습니다. 1982년 사제 양성을 위해 47년만에 선목신학대학으로 재개교한 후 1985년 대구가톨릭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고, 1994년에는 효성여자대학교와 통합하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대구관구 대신학원)이 되었습니다. 옛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은 ㄷ자형 평면으로 중앙 성당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었으며, 1층 전면에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사용되던 연속 아치가 있어서 툇간 역할을 했습니다. 1946년 당시 폐교 상태에 있던 신학교는 대건초급중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대건중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가, 1991년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이전해 오면서 전면으로 돌출되었던 양 날개가 철거되고 성당을 포함한 중앙 일부만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신학교 건물은 1990년 12월 15일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4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기존 건물을 재정비해 '성 유스티노 신학교 100주년 기념관'을 개관하였습니다. |



1914년
10월 3일 대구에서 개교한 신학교. 개교 이래 67명의 사제를 배출하면서 교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45년 3월
19일 폐교되었다.
설립과
변모 드망즈 주교의 노력으로 1914년 10월 3일 개교한 신학교는 기부자의
요청대로 학교 이름을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정하고, 첫 신입생으로 주재용 등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7명의 대구 대목구 소속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7명을 받아들였다. 신학교의 학제는 용산 신학교와 같이 라틴어 교육 중심의 보통 교육 과정(소신학과 6년)과 철학 및 신학
과정(대신학과 6년)이었으며, 대신학과와 소신학과는 각각 2학급으로 구성되었고, 신입생은 3년마다 50명 내외를 선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8년 2월 23일에 주재용이 성 유스티노 신학교 출신의 첫 번째 사제로 서품되었다.
1930년대
들어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대 · 소신학과의 분리라는 학제상의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 · 소신학과의 분리는 신학생들에게 일반 교양 과목을
가르침으로써 신학 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1928년 말 서울 신학교에서 먼저 도입하였다. 그 결과 용산의 소신학생들은
1929년 9월부터 남대문상업학교(동성상업학교의 전신) 을조(乙組)로 편입되었고, 대구의 소신학생들은 1930년 12월 16일 드망즈 주교가
뮈텔 주교와 연합 소신학교 구성을 협의함에 따라 1931년부터 혜화동의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하게 되었다.
1945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된 이후, 1982년 47년 만에 선목신학대학으로 재개교해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아 사제 양성의
요람으로 거듭났다. 1985년 선목신학대학은 대구가톨릭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고, 1994년에는 효성여자대학교와 통합하면서 지금의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대구관구 대신학원)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