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해미성지
관리자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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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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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고을은 조선 중기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위한 진영이 있던 곳으로 진영장이 현감을 겸해 지역을 통치하며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 해미 진영은 수많은 천주교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는데, 공식적인 박해 외에도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의 옥사에는 늘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나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자리개질 등으로 죽어갔습니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이나
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순교한 이들의 정확한 신원과 행적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수천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의 이름과 출신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생매장과 수장으로 숨져 간 진둠벙 주변에는 십자가의 길과 노천 성당 등이 조성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읍성에는 동헌과 교우들을 가두었던 옥사가 복원되었고, 그 앞에는 고문대로 쓰던 호야나무가 남아 있습니다. 서문 밖 순교성지에는 1956년 서산 성당으로 이전하여 보존하던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 원위치를 찾아 복원되었다가 2009년 1월 다시 해미 성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고, 1989년에 건립한 순교현양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1935년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 뒷산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원래의 순교터인 해미 순교탑 앞으로 이장되었습니다. 해미 성지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신심을 기리기 위해 2003년 6월 무명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성당 뒤에는 묘지 형태의 유해참배실을 건립했습니다. 유해참배실은 2009년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2008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 고시된 해미 성지는 2015년까지 지자체와 함께 역사를 간직한 순례지로 개발할 예정입니다.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를 위해 해미 성지를 방문하여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을 갖고 해미읍성에서 폐막미사를 집전했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11:00 | |
| 평일미사 | 월 | 11:00 | |
| 화 | 11:00 | ||
| 수 | 11:00 | ||
| 목 | 11:00 | ||
| 금 | 11:00 | ||
| 토 | 11:00 | 후원회원들을 위한 미사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순교지나 선조들의 위대한 정신과 숨결이 느껴져 후손을 자랑스럽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폐부를 찌르는 깊은 신음과 함께 서려 있기도
하다.
이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 · 참수
· 몰매질 · 석형 · 백지사형 ·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 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이들이
숨져 간 유적지는 현재 깨끗하게 단장돼 있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교우들의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라 알아듣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오는 생매장터인 진둠벙 주위로 십자가의 길 14처와 노천 성당이 조성되었다.
해미
성지는 3,000여 명의 무명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신심을 기리기 위해 2003년 6월 새 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소성당과
대성당은 무명 순교자들의 생매장 구덩이를 상징하는 원형구조로 건립되었고, 실내 장식과 외부 건물 또한 죽음을 통해 영원한 안식에 이른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쉼터의 이미지를 갖도록 했다. 성당 뒤편에는 묘지 형태의 유해참배실을 건립하였다. 유해참배실은 2009년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해 축복식을 가졌다.

충청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순교 터가 되어 온 곳은 공주와 해미, 그리고 홍주였다. 이 중에서 해미는 병마절도사의 읍성이 있는데다가 내포 지역과
가까웠으므로 1799년에 인언민(마르티노)과 박취득(라우렌시오)이 순교한 이래 박해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특히 덕산의
'배나드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3구)는 1817년에 해미 포졸들이 몰려와 신자들을 해미로 끌고 가서 처형한 애환을 담고 있는 교우촌이다.
또 그 이웃에 있는 '용머리'(현 삽교읍 용동리의 주래)는 인언민의 생매장지로, 1991년 이래 삽교 본당 신자들이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조성한
사적지가 있다.
한편
홍주와 해미는 공주 감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한국 행형사(行刑史)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남형(濫刑)이 자행되었다. 사람의 머리를
쇠도리깨로 치거나 큰 형구돌 위에 머리를 놓고 쳐서 죽이는 자리개질이 있었고, 사람의 머리를 누인 뒤에 대들보 형틀을 내리쳐 한 번에 여러
사람을 죽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것은 해미와 홍주에서 있었던 생매장이었다.
노인들의
증거에 따라서 모든 사정을 자세히 조사한 후, 금년(1935년) '조산리'에서 치명자의 유해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교우들을 묻어 죽인 구덩이
속의 흙이 썩은 것을 보면 의심 없이 몇 십 명이 되나, 아직 남아 있어 수습된 유해는 10여 명 가량밖에 안 된다. 병오년(1906년) 큰물에
봉분이 다 없어져서 무덤의 형적은 보이지 아니하였지만, 증인들의 가르침에 따라 똑똑히 안 후에 서산과 해미 관공서의 승낙을 얻어 발굴한 결과
유해를 많이 얻게 되었다("해미 치명자 유해", [경향잡지] 제29권 815호-제30권 822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