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황새바위
관리자
대전
0
14276
0
2017.01.31 17:04
|
|
|
공주는 한국 천주교회가 안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거룩한 땅이요 충남 지역 신앙의 요람입니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공주
감영이 있었고, 충청도 각지에서 잡혀 온 천주교인들은 공주 감영으로 이송돼 배교를 강요당하고 이를 거부할 때에는 ‘황새바위’라고 불리는 곳에서
여지없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공주 황새바위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출신지는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 한양 등 매우 다양하며, 그 중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도 248명에 이릅니다.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순교자로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손자선 성인과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내포 지방의 사도’ 이존창이 있습니다. 현재 공산성을 마주하고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는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해 공주 교동 본당에서 세운 13.8미터 높이의 순교탑이 서 있고, 공주의 순교자 248위의 명패가 새겨진 돌무덤 형태의 경당이 있습니다. 또한 무덤경당 앞 순교자 광장에는 12개의 빛돌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비석이자 12사도를 상징합니다. 2002년 11월 성지 입구에 미사와 강연 등을 위해 대경당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고, 2008년 12월에는 황새바위 순교성지가 충청남도 기념물 제178호로 등록되었습니다. 2009년 대경당을 보수해 성당을 짓고, 2012년 1차 종합개발을 시행해 순교자 광장과 야외성당을 조성하고 무덤경당을 원래 설계대로 재건축해 그해 10월 20일 축복식을 갖는 등 성지의 면모를 일신하였습니다. 이어 2014년 순교탑을 보수하고, 2015년 빛의 길 · 묵주기도 길 · 십자가의 길 · 십자가 언덕 등을 조성하고, 아담한 크기의 부활성당도 건립했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11:00 | 매월 첫 주일은 후원회원 미사 |
| 평일미사 | 월 | 09:30 | |
| 화 | 11:00 | ||
| 수 | 11:00 | ||
| 목 | 11:00 | ||
| 금 | 11:00 | ||
| 토 | 11:00 | 매월 첫 토요일 성모신심미사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충청남도
공주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피를 뿌린 곳이다. 후백제를 일으키기 위해 수많은 군사들이 일어나서 웅진에서 싸우다가 나당 연합군에게 쓰러져 피를
흘렸다. 동학 농민 운동 때에는 전라도에서 발호한 수만 명이 우금치 고개를 넘어 공주로 들어오다가 참패해 죽음을 당했다.
공주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출신지를 보면 홍주 · 예산 · 해미 · 덕산 · 신창 · 홍산 · 연산 · 청양 · 보령 · 진잠 · 유구 · 직산 · 천안
· 공주 · 비인 · 면천 등 충남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충북의 청주 · 진천 · 연풍 · 옥천, 전라도의 전주 · 광주, 경기도의
죽산 · 포천 그리고 한양 출신의 유배 신자 등 매우 다양하다. 충청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붙잡힌 교우들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왔고,
끝까지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바로 이곳 '황새바위'라고 불리는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교우들 중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들만 해도 무려 248명에 이른다. 이중 가장 널리 알려진 순교자로는 병인박해 때 공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으면서 관장이 살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하라고 명하자 주저 없이 제 살을 물어뜯음으로써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한 손자선
토마스 성인과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내포 지방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있다.


공주
황새바위는 한국 천주교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증언지 중 하나로 그 의미가 크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남북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지금의 시에 해당하는 감영이 있었다. 이곳 공주 감영에서는 각 지방에서 잡혀 숱한 심문과 무서운 고문을 당하고도 배교하기를 거절하였을 때에는
감사의 명에 의해 황새바위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충청도 각 지방뿐 아니라 타 지역으로부터 끌려와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교우들도 많았다.
충남의 홍주, 예산, 해미, 덕산, 신창, 홍산, 연산, 청양, 공주, 이인, 탄천과 충북의 청주, 진천, 연풍, 옥천, 전라도 전주, 광주,
경기도 죽산, 포천, 그리고 한양의 교우들이 공주에 와서 순교 하였다.
순교자들은
참수, 교수, 돌로 맞아 죽음, 옥사, 아사, 매질 등으로 죽어 갔는데, 교회사가 달레(Dallet, Claude Charles)는 공주
감영에서 있었던 교수형에 대해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매듭으로 된 밧줄 고리를 죄수 목에 씌우고
밧줄 끝을 벽의 구멍으로 내려 보낸다. 그리고 옥 안에서 신호를 하면 밖에서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당긴다. 희생자가 죽으면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어 장례도 지내지 않고 밭에 내버려 둔다."고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구멍이 있는 형구돌이 사용되었는데 구멍에 줄을 넣고 죄수의
목에 얽어맨 다음 형구돌의 반대편에서 줄을 잡아 당겨 죽였다.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공주에서도 병인박해 당시에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고,
조정의 박해령이 멎은 뒤에도 지방에서는 아직 그 여파가 남아서 피흘림이 계속되었다.
충청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순교 터가 되어 온 곳은 공주와 해미, 그리고 홍주였다. 이 중에서 해미는 병마절도사의 읍성이 있는데다가 내포 지역과
가까웠으므로 1799년에 인언민(마르티노)과 박취득(라우렌시오)이 순교한 이래 박해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특히 덕산의
'배나드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3구)는 1817년에 해미 포졸들이 몰려와 신자들을 해미로 끌고 가서 처형한 애환을 담고 있는 교우촌이다.
또 그 이웃에 있는 '용머리'(현 삽교읍 용동리의 주래)는 인언민의 생매장지로, 1991년 이래 삽교 본당 신자들이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조성한
사적지가 있다.
한편
홍주와 해미는 공주 감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한국 행형사(行刑史)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남형(濫刑)이 자행되었다. 사람의 머리를
쇠도리깨로 치거나 큰 형구돌 위에 머리를 놓고 쳐서 죽이는 자리개질이 있었고, 사람의 머리를 누인 뒤에 대들보 형틀을 내리쳐 한 번에 여러
사람을 죽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것은 해미와 홍주에서 있었던 생매장이었다.
노인들의
증거에 따라서 모든 사정을 자세히 조사한 후, 금년(1935년) '조산리'에서 치명자의 유해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교우들을 묻어 죽인 구덩이
속의 흙이 썩은 것을 보면 의심없이 몇 십 명이 되나, 아직 남아 있어 수습된 유해는 10여 명 가량밖에 안 된다. 병오년(1906년) 큰물에
봉분이 다 없어져서 무덤의 형적은 보이지 아니하였지만, 증인들의 가르침에 따라 똑똑히 안 후에 서산과 해미 관공서의 승낙을 얻어 발굴한 결과
유해를 많이 얻게 되었다("해미 치명자 유해", [경향잡지] 제29권 815호-제30권 822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