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죽림동성당
관리자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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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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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동 주교좌성당의 모체는 1920년
풍수원 성당에서 분가한 곰실 본당으로 엄주언 마르티노(말딩)의 헌신적인 전교활동의 결과로 설립되었습니다. 청년 시절 우연히 천주교 서적을 읽고
구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그는 가족과 함께 천진암으로 가서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고향에서 쫓겨난
그는 고은리의 한 폐가를 사서 정착한 후 자선과 모범적 신앙생활로 이웃들을 감화시켜 300명에 가까운 신자가 생겼습니다. 엄주언 회장의 헌신적
노력으로 1920년 공소를 건립하고 상주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과 그 해 9월 김유룡 초대 주임신부가 부임하여 춘천 지역 최초의 본당이
되었습니다. 그 후 곰실 본당은 춘천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1928년 현 죽림동 성당 아래 땅을 사서 춘천 본당을 설립하였습니다. 1938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춘천 본당 제5대 주임으로 부임한 퀸란 토마스 신부는 부임 직후 인근 부지를 매입하여 현재의 성당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1940년 제2대 춘천 지목구장으로 임명된 퀸란 신부는 1949년 4월 새 성당 건립을 시작했지만 다음해 6.25전쟁의 발발로 인민군에게 피랍되었고, 성당 또한 1951년 5월 유엔군의 반격 공습 중 일부 파손되었습니다. 전쟁 중인 1951년 8월 제13대 주임으로 부임한 커머포드 토마스 신부는 복구 작업을 시작해 미군과 교황청의 도움으로 1953년 대부분 마무리했습니다. 1950년 본당명을 죽림동 본당으로 변경한 후 오랜 풍상으로 노후화되자 춘천교구는 죽림동 성당에 대한 대대적인 중창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번 작업에는 많은 미술가와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전례 거행에도 합당하고 예술적으로도 빼어난 성당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죽림동 성당 터를 마련하고 그 기초를 놓은 엄주언 회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성당 언덕 아래 춘천교구 가톨릭 회관으로 사용할 말딩회관(사제관 포함)을 건립하여 1999년 4월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2003년 6월 25일 죽림동 성당은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4호로 등록되었습니다. 2013년 12월 1일 성당 앞 부지에 전정, 중정, 회랑 등을 지은 죽림동 성당 성역화 사업 축복식을 가졌고, 2014년 6월 1일에는 교구와 본당 주보인 예수성심상을 청동으로 제작해 설치한 후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07:00 | |
| 09:00 | 학생미사 | ||
| 11:00 | 교중미사 | ||
| 19:00 | |||
| 21:00 | |||
| 평일미사 | 월 | 06:00 | |
| 화 | 06:00 | ||
| 19:00 | |||
| 수 | 06:00 | ||
| 19:00 | |||
| 목 | 06:00 | ||
| 19:00 | |||
| 금 | 06:00 | ||
| 19:00 | |||
| 토 | 06:00 | ||
| 16:00 | 어린이미사 | ||
| 19:00 | 특전미사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천주교의
강원도 전래
이처럼
강원도 지방에 천주교가 전래된 지 80여 년 동안, 상주하는 신부 없이도 교인 수는 소리 없이 늘어 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88년
서울에서 조선 대목구장 뮈텔(Mutel) 민 주교에 의해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풍수원이 본당이 되었으니 신태보의 피난 이후 무려 87년만의 일이었다.
한편
죽림동 본당의 모체인 춘성군 동내면 고은리 곰실 공소는 1920년에 본당으로 정식 설립되기까지 정규하 신부가 해마다 서너 번씩 찾아가 가정집과
강당에 모이곤 하였으나 교우 수가 무려 300명에 이르자 본당 설립과 상주 사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엄주언
일가는 이처럼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따돌림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맨손으로 어렵사리 화전을 일구어 가며 묵묵히 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주경야독 하며
근검하게 사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차츰 감동하여 가르침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윗 너브랭이에서 여러 해 땀 흘린 보람이 있어 살림과 농지를 늘려
아랫 너브랭이로 옮겼다가 다시 곰실 공소로 옮긴 후 조촐한 강당까지 마련하여 공소 예절을 보게 되자, 물구비 · 춘천 · 화천 · 양구 순으로
공소를 순방하던 정규하 신부가 곰실에서 해마다 40-50명 씩 세례를 줄 정도가 되었다. 곰실 공소 교우들은 엄 회장 지도하에 자선 봉사와
엄하고 독실한 모범적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마침내 300명 가까운 수로 늘어났다. 1920년에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건립하고 지역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실로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그
후 1938년 제5대 유영근 요한 신부까지 방인사제가 주임을 맡다가 같은 해에 강원도 지역의 사목 책임이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되고, 곧이어
라리보(Larribeau, 元) 주교가 맡고 있던 서울(경성) 대목구에서 춘천 지목구가 1939년 4월 25일자로 분할되면서 새 지목구의 초대
지목구장으로 당시 광주 지목구장인 오원 맥폴린(Owen McPolin) 신부가 겸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임지에 가서 직접 사목활동을 하지
못한 채 얼마 후 춘천 본당 제6대 주임으로 있던 퀸란(Quinlan, 具) 신부를 대리로 임명하였다. 퀸란 신부는 1940년 12월 8일
제2대 지목구장이 되었다.
실제
건축 작업은 전남 광주에서 온 ‘자’씨 성의 한 화교 기술자와 또 한 사람의 기술자가 맡았다. 석재는 멀리 홍천 발산리 강가에서 날라다 썼다.
그러나 거의 한 해 동안 돌로 외벽을 훌륭하게 다 쌓고 동판 지붕까지 덮고 나서 내부 공사에 들어갈 참에 6.25 전쟁이
터졌다.
이밖에도
춘천 지목구에서는 6.25 전쟁을 전후로 평강 본당의 백응만(白應萬, 다마소) 신부가 연행되어 옥사했고, 의주 본당의 김교명(金敎明, 베네딕토)
신부가 행방불명되었으며, 소양로 본당의 콜리어(Collier, 高) 신부와 홍천 본당의 크로스비(P. Crosbie, 趙) 신부도 퀸란 지목구장
신부와 함께 죽음의 행진을 했다. 연길 · 함흥 · 원산 지역의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의 남하를 헌신적으로 돕던 양양 본당의
이광재(李光在, 티모테오) 신부 또한 1950년 6월 24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9일
총살당하였다.
주교좌성당
중창(重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