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한티성지
관리자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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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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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24km, 심신산골에
위치한 한티는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그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순교 성지입니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인근의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산 것으로 추정됩니다. 1860년 경신박해로 흩어졌던 신자들이 박해가 뜸해지자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수차례의 박해를 넘긴 한티 마을은 1866년 시작하여 3년 가까이 이어진 병인박해의 여파로 인해 최후를 맞게 됩니다. 1868년 한티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는 교우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마을은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박해 소식을 들은 인근 교우들이 왔을 때에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해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했고, 지금까지 확인된 순교자의 묘는 모두 37기로 그 중 조 가롤로 가족 등 4기만 신원이 알려져 있습니다. 박해의 먹구름이 지나간 뒤 조영학 토마스(조 가롤로의 아들)와 몇몇 교우들은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순교자들의 영성을 이어가기 위해 공소 재건에 앞장섰습니다. 재건된 공소는 1900년 초 신자 수 80여명 이상의 전성기를 거쳐 성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기까지 공소의 명맥을 유지해 왔습니다. 1980년대 초부터 순교 성지 개발을 위한 부지 매입과 조사를 시작한 대구대교구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확인하고, 1991년 피정의 집, 1995년 성지 관리 사무소, 1998년 옛 공소 복원, 2000년 대구 대신학교 영성관, 2004년 순례자 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12년 9월에는 순교자 서태순 베드로의 세례명과 순교 연도 등을 바로 잡은 새 비석을 제작해 묘지에 세우고 축복식을 거행하였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11:00 | 단체순례미사는 사전 요청시 가능 |
| 평일미사 | 토 | 16:00 | 특전미사 |
| 기타 | 11:00 | 후원회 월례미사(매월 셋째주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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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24km,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漆谷郡 東明面 得明里)에 자리한 한티는 산골 중에서도 깊은 산간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산괴(八公山塊)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m가 넘는 이 심심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그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인근의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살지 않았나 추정된다. 하지만 매우 일찍부터 한티에는 교우들이
자리를 잡아 대구와 영남 지방 교회의 터전이 돼 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순식간에
평화롭던 마을은 피바다가 되었고 수십 명의 신자들이 한자리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박해 소식을 듣고 인근에 살던 교우들이 한티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해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하였다.
동명면
시내에서 한티 방향으로 조금 가면 송림사가 있고 그 앞에는 한국 성모의 자애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가 요양원’이 있다. 순례자들은 대개 이
앞에서 발을 멈추고 묵주의 기도를 시작하여 말끔히 포장된 한티로를 걸어서 성지 입구에 이르게 된다. 또한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에 있는 또 하나의
사적지인 신나무골에서 한티까지의 30리 산길은 도보 순례 코스로 아주 적당하다.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로 흩어지게 된 경상도 북부의 교우촌 신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북부의 상주와 문경은 물론 남부의 양산,
울산, 밀양 등에 있는 산간 지대가 바로 그들이 찾은 새로운 은거지였다. 칠곡의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도 이 무렵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칠곡군에 있으면서도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리)은 한티에 비해 찾기 쉬운 곳에 있다. 왜관에서 4번 국도를 따라 5km 남짓 대구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기 때문이다. 이곳에 새 터전을 잡은 교우들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한티 쪽으로 피신을 갔는데, 경신박해 때는 칠곡에 거주하던
이선이(엘리사벳) 가족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로 피신하던 중에 체포되어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포졸들이 가져온 농가의 작두날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때 배교하고 살아남은 엘리사벳의 남편은 뼈 저리는 아픔 속에서도 모자의 시신을 이곳에 묻었다가 훗날 부인의 시체만을
찾아내 선산이 있는 칠곡 안양동으로 이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