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풍성지
관리자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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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2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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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은 성 황석두 루카의 고향이며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교우촌입니다. 박해를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혜의 도주로를 이용해 관문 성벽 밑의 수구문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했습니다. 연풍과 새재가 기억하는 첫 인물은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을 전한 최양업
신부입니다. 새재 아랫마을인 문경시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선종한 최양업 신부는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뒷산에
안장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황석두 성인은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젊은 나이에 과거 길에 나섰다가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돌아와 가족들의 모진 반대를 극복하고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켰습니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주교를 도와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 위앵과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 등과 함께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습니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63년 공소로 쓸 옛 향청 건물을 매입하면서부터입니다. 3백년이나 된 이 건물을 매입할 때만 해도 순교 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매입 후 논과 집 터를 정리하던 중 형구돌이 발견되었습니다. 또 1968년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임이 드러나자 성지 개발이 가시화되어 1979년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문중 산에 묻힌 성인의 유해를 1982년 연풍 성지로 천묘했습니다. 이어서 다섯 성인상과 반석, 대형 십자가와 경당, 향청 건물 복원 및 야외제대와 성모상 등을 마련해서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2014년 9월에는 성 황석두 루카 탄생 200주년 기념성당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11:00 | |
| 평일미사 | 화 | 11:00 | |
| 수 | 11:00 | ||
| 목 | 11:00 | ||
| 금 | 11:00 | ||
| 토 | 11:00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경상북도
문경과 충청북도 괴산을 접하고 있는 문경새재를 넘어서면 괴산군 남동쪽 끝의 연풍면이 나온다. 해발 1,017m의 험준한 고갯길, 새재의 서쪽
기슭에 연풍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남부여대(男負女戴)로
보따리를 싸서 박해의 서슬을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험(天險)의 도주로를 이용해 여차하면 밤을 틈타 험준한 산속으로 숨어들어
새재 제1, 2, 3관문 성벽 밑에 있는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죄인 아닌 죄인, 도둑 아닌
도둑으로 한스럽게 살았던 교우들이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잠깐 눈을 붙인 틈을 타 숨죽여 가며 드나들던 그 수구문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연풍에서는
황석두 루카(黃錫斗, 1813-1866년) 성인의 발자취가 빛을 발한다.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나이 스물에 과거 길에 나섰다가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돌아온 그는 가족들로부터 모진 반대를 받았다. 화가 난 부친은 작두를 마당 한 가운데 놓고 아들의 목을 걸게 하였지만 태연히
목을 내밀자 눈물을 흘리며 그만 두었다. 그로부터 2년 이상을 벙어리처럼 산 끝에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켰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안 주교는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고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하도록 했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 공소로 사용하기 위해 옛 향청 건물(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을 사들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3백년이나 묵은 이 건물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이 순교 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매입 후 논과 집 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1964년, 1972년, 1992년 각 1개씩 3개나 발견되었다. 그중 처음으로 발견된 형구돌은
1974년 절두산 성지로 이전되었다.
매년
3만여 명의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연풍 성지에는 황석두 성인과 함께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의 다섯 성인상과 반석(오성바위)을 재현하여 1986년 축복식을 가졌다. 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과 높이
8.5m의 대형 십자가는 순례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연풍은
본래 산수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화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조령 관문 아래의 수옥 폭포에서 내려오는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에 자리잡고 있으니, 풍수지리적으로는 최적의 거주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연풍은 이제 지리적 위치보다는 천주교 성지로서 교우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연풍과
관련하여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곳이 바로 황석두(루카) 성인의 고향이요, 연풍 성지는 곧 그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충효는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것이 제일이요, 임금과 부모께 대한 것은 그 다음일 뿐입니다. 세속 일에서도 친구나 이웃에게 해가 되는 일을
고발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 한 형제인 교우들을 고발하고 교회 일을 발설하겠습니까? 관장께서 이를 강요하는 것은 어찌된 도리입니까? 1866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세상에 널리 편 것은 어느 성인도 가르칠 수 없는 진리이니, 어찌 그 가르침을
배반하겠습니까?([우포도청등록], 병인 2월 3일, 황석두 공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