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박대식 빅토리노 묘

Korea Martyrs Shrine 한국의 순교 성지

김해 박대식 빅토리노 묘

관리자 0 7205 0
 간략설명 죽어서도 선산에 못 묻히고 남의 문중 산에 평장으로 누워
 지번주소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산30(책골) 
 전화번호 (055)345-3226
 팩스번호 (055)345-3227
 홈페이지
 전자메일 c1jl@cathms.or.kr
 관련기관 진례 성당    
 관련주소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진례로223번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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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무진박해 때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한 박대식 빅토리노와 부인의 묘.한국 천주교회 초창기 신자들은 주로 서울과 경기 지역에 살았다. 그러다가 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할 곳을 찾아 강원 · 충청 · 전라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신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상도 지역에 신자들이 늦게 나타난 것은 지리적인 이유로 특히 마산교구가 위치한 서부 경남지역에 가장 늦게 신자들이 등장했다. 그로인해 초기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때 이 지역에서는 순교자가 나오지 않았다.
 
마산교구 지역으로 신자들이 들어온 경로는 두 가지로 추측하고 있다. 첫째는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지방에 숨어 있던 교우들이 남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합천, 창녕, 의령, 밀양, 진영, 함안 등지에 교우촌을 세웠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오래된 공소들이 남아 있다. 둘째는 1827년 정해박해가 곡성(谷城)을 시작으로 해서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되자 지리산과 백운산을 넘어 서부 경남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함양을 본거지로 하여 단성을 거쳐 문산, 고성, 통영, 거제도로 흘러갔고 일부는 단성에서 북천을 거쳐 곤양, 서포 쪽으로 내려갔다.
 
이러한 교우촌들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안정된 공동체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특히 문산, 함안(대산), 고성, 통영(황리), 진영, 거제도에는 큰 규모의 교우촌이 있었다.
 
박대식 빅토리노의 순교 후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선영에 모시려 했으나 집안 외인들의 반대로 이곳 유씨 문장 산에 평장으로 매장했다가 1956년에 봉분을 조성했다.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1812-1868년)는 1812년 경상도 김해 예동(현 경남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詩禮里)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들 삼형제(종립 · 종반 · 종철)를 두었다. 그가 언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입교한 이후 부친 박만혁과 형제 대붕 · 대흥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병인박해를 만났다. 다행히 이때는 가족 모두가 피신하여 체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68년 7월 7일 무진박해 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과 김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와 형 박대홍과 예비신자인 조카 박수연(47세)과 함께 체포되어 김해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만나 3일간 문초를 받으면서도 서로 위로하며 믿음을 지켰다. 대구로 압송된 그들은 감영(監營)에서 혹형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증거했다. 가족들이 면회를 왔을 때는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옷으로 몸을 가렸다고 한다.
 
결국 대구 감사는 박대식과 그의 동료들을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따라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 박대식은 조카와 송 마태오, 박 요셉과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박대식의 나이는 56세였다.
 
순교자 묘역으로 가는 산길 입구와 폐쇄된 진영 터널. 남해 고속도로 김해 터널이 생긴 후 진영 터널 두 개 중 하나는 폐쇄되었다.경상감사는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준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머리를 매달도록 했다. 순교 소식을 듣고 대구로 온 가족들은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와 선영에 모시려 했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 외인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아들과 친척들이 다동(현 경남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책골) ‘유씨’ 문중 산에 평장으로 매장했다.
 
그 후 90여 년이 지난 1956년 봄에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도 이장해 완전한 묘역으로 가꾸었다. 그리고 1966년 4월 15일 당시 진영 본당 주임이었던 유창호(劉昌鎬) 토마스 신부의 주선으로 순교자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이때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순교자의 세례명을 임시로 ‘노롄조’(라우렌시오)라 하여 비석에 새겼다. 순교자 박대식의 묘는 이곳에 시신을 모신 후 한 번도 이장하지 않은 무덤이다. 그 후 박대식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교회사가 마백락 클레멘스와 순교자의 4대 손인 박영식 요아킴의 노력으로 2001년 8월 순교자의 세례명이 ‘빅토리노’임을 밝혀냈다.
 
부산 쪽에서 남해 고속도로를 타고 오면 김해 터널을 지나게 되는데 터널 왼쪽 아래 지금은 폐쇄된 진영 터널 조금 못 미쳐 표지판을 따라 산길로 들어서면 순교자와 부인의 묘소가 있다. 묘지를 관리하는 진례 본당은 매년 묘소에서 순교자 후손들과 함께 순교자를 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고, 마산교구 또한 장기적인 차원에서 성역화 사업을 추진 중이다. 한편 박대식 빅토리노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마산교구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9월 1일)]

박대식 빅토리노 순교자 묘역 전경.
박대식 빅토리노는 1812년 현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입교한 후 가족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8년 무진박해 때 대구와 김해에서 온 포졸들에게 잡혀 조카 박수연과 함께 김해 관아로 압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만나 3일간 문초를 받으면서도 서로 위로하며 믿음을 지켰고, 대구로 압송되어 감영에서 혹형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했습니다. 가족들이 면회를 왔을 때는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옷으로 몸을 가렸다고 합니다.

결국 박대식은 1868년 10월 12일 조카와 송 마태오, 박 요셉과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가족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와 선영에 모시려 했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 외인들의 반대로 인근의 유씨 문중 산에 평장으로 매장했습니다. 그 후 1956년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도 이장했습니다. 1966년 진영 본당 주임신부의 주선으로 순교자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고, 2001년 그의 세례명이 빅토리노임이 밝혀졌습니다. 진례 성당은 매년 후손들과 함께 순교자를 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박대식 빅토리노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미사시간
미사구분 요일 시간 기타사항
주일미사 10:30  교중미사, 미사 일정은 진례 성당 것입니다.
평일미사 19:30  
19:30  
10:00  
10:00  
19:30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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