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지세포리(순교복자 윤봉문 요셉)
관리자
마산
0
10850
0
2017.02.02 21:18
|
|
|
거제도 진목정 족박골(현 옥포)에는
‘거제의 사도’로 불리는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의 묘가 있었습니다. 신유박해 당시 신자들의 유배지였던 거제도에 병인박해 직전 리델 신부가 전교를
위해 다녀가면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8년경 박해를 피해 거제로 들어와 진목정에 정착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가 활발한
전교활동을 펼쳤습니다. 윤봉문은 윤사우의 둘째아들로 진 아녜스와 혼인하여 아들딸을 낳고 살면서 형 경문 베드로와 함께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썼습니다. 1887년 겨울, 대구 본당 초대주임인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방문했을 때 신부를 안내하고 교리교육과 공소예절을 돕던 윤봉문은 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봄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당시는 한불수호조약으로 인해 공적인 박해가 끝났지만 지방 일부에서는 사사로운 탄압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박해는 통영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여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려고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수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내 배교하지 않고 천주십계와 성교사규를 외우던 그는 결국 진주로 압송되어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순교자의 시신은 진주 장재리 공소회장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안장했다가 1898년 옥포 교우이며 부산 본당 우도 신부의 복사로 있던 성낙진 바오로와 유족들에 의해 옥포의 선산으로 이장했습니다. 거제도의 신자들은 1978년 9월 윤봉문 요셉 순교 9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자의 무덤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고, 거제와 통영 지역 본당들은 순교자에 대한 현양 사업과 함께 묘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거제도 일운면 지세포리의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는 옥포의 순교자 묘소가 산중에 있어 접근이 어렵고 또 후손들의 선산이 타인 소유로 넘어가자 새로운 이장 부지로 선정된 곳입니다. 거제도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었고, 중앙에 순교자 현양비도 건립되었습니다. 마산교구는 순교자 유해 이장에 관한 거제지구 사제단과 신자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교구장 교령과 훈령을 발표하고 2013년 4월 20일 순교자 유해를 옥포에서 지세포리로 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향후 순교자 기념성당과 교육관, 피정의 집 등을 건립하여 누구나 쉽게 찾아와 순교자의 영성을 본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개발할 계획입니다. 순교자 윤봉문 요셉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06:30 | 미사 일정은 옥포 성당 것입니다. |
| 10:30 | 교중미사 | ||
| 19:30 | 청년미사 | ||
| 평일미사 | 월 | 06:30 | |
| 화 | 19:30 | ||
| 수 | 10:00 | ||
| 19:30 | |||
| 목 | 10:00 | ||
| 19:30 | |||
| 금 | 10:00 | ||
| 19:30 | |||
| 토 | 16:00 | 어린이미사 | |
| 18:00 |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거대한 공업 단지로 변해 버린 거제도의 장승포와 옥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몸을 누이고 있었던 순교 복자 윤봉문(尹鳳文,
1852-1888년) 요셉은 초기 한국 교회의 박해가 얼마나 극심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났었는지를 후손들에게 전해 준다.
또
한 사람은 1801년 전주 감영에서 순교한 유항검의 막내아들 유일석이다. 유항검의 부인 신희와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차남 유문석은
순교했고 딸은 흑산도로, 셋째아들 일문은 신지도로, 당시 세 살이던 막내 일석은 거제도로 귀양 갔다고 한다. 이 가운데 유항검, 유중철,
이순이, 유문석은 2014년에 복자품에 올랐다.
윤사우는
날품팔이와 필묵 행상을 하며 몰래 신앙생활을 하던 중 옥포에서 동수(洞首)로 있던 진진부(陣進富)를 알게 되어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신자가 된 진진부 요한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인 윤봉문 요셉을 사위로 맞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 윤봉문과 부인 진순악(陳順岳) 아녜스
사이에서 아들 학송(學松) 루카와 딸 송악(松岳) 가타리나가 태어났다.
그
후 이웃에 살던 잔반(殘班) 하나가 돈을 갈취하려고 그를 잡아 돈을 요구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포졸들에 의해 읍의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80냥을
주면 풀어주고 새 신자들이 평온히 살도록 해주겠다는 말로 유혹해 할 수 없이 돈을 주고 풀려났다. 그러나 얼마 후 부사의 체포령을 갖고 포졸들이
다시 왔고, 이에 형 경문이 관아로 끌려가 곤장을 맞고 이틀 후 읍 밖으로 쫓겨났다.
순교자의
시신은 진주 비라실[長在里] 공소회장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안장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베르 신부는 교구장에게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열심한 교우였으며,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벌써 그에게 눈길을 주어 여러 섬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서 저를 돕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윤봉문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 접근성이 떨어지는 협소한 산중인 관계로 순례자들이 찾기 어렵고, 후손들의 선산이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
묘소를 이장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마산교구 거제도의 성당들은 2000년 9월 순교자의 묘소를 이장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장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여러 후보지를 검토하고 또 여러 이유로 유보되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일운면 지세포리가 선정되었다. 이 부지는 본래
서울대교구가 신협 연수원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마산교구에 기증한 곳이었다. 진입로가 없어 포기했던 곳이었지만 인근 농로를 매입해 시의 도움을 받아
진입로를 만들면서 성지 조성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거제도의 신자들은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탓에 대나무와 편백나무로 뒤덮인 성지 조성 부지를 찾아
직접 나무를 베고 길을 만들며 헌신적인 봉사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울창한 숲 사이로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 길을 우선 조성했고, 중앙 부분에
순교자 현양비도 건립하였다. 순교자 현양비는 죄인들에게 씌우던 형틀인 칼을 형상화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