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가실성당
관리자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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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1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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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끝난 1894년
신나무골에서 경상도 북부 지방 선교를 담당하던 파이야스 신부는 가실(佳室)로 이주하여 순교자 성순교가 살던 기와집을 매입하여 가실 성당을
설립했습니다. 1912년 부임한 투르뇌 신부는 1944년 지병으로 사망하기까지 가실 본당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일제 치하의 어려움 속에서도
전교 활동에 노력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또한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1925년 9월 드망즈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교황 사절
지아르디니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했습니다. 투르뇌 신부는 1922-1924년 사이에 현재의 신 로마네스크식 벽돌조 성당을 건립했는데, 설계는 명동 성당과 대구 계산 성당을 지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와넬 신부가 담당했습니다. 프와넬 신부는 중국 기술자들에게 벽돌을 한 장씩 굽도록 하여 잘 구워진 것은 성당을 짓는데, 중간치는 사제관을 짓는데, 품질이 나쁜 것은 버렸다고 합니다. 당시의 유물과 유산은 현재 유물관(구 사제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도시화와 탈농촌 현상으로 신자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1990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성모동굴과 교육관을 마련하고 순교자 성순교 가문의 신앙 유적비를 세워 1995년 100주년을 맞아 봉헌했습니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 동양화가 손석희가 그린 십자가의 길 14처와 독일의 유명한 색유리 작가 에기노 바이너트가 제작한 유리화를 2002년에 설치했습니다. 10개의 창문에 설치된 유리화의 주제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대구대교구에서 현 계산 주교좌성당에 이은 두 번째이자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물인 가실 성당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근대 건축사와 교회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옛 사제관과 함께 2003년 4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구대교구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낙산 본당으로 변경된 본당명을 2005년 2월 본래의 가실 본당으로 다시 변경했습니다. 2011년 7월에는 16년이나 늦었지만 충분한 자료를 토대로 “가실(낙산) 성당 100년사”를 출판했습니다. |
| 미사시간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 주일미사 | 일 | 07:00 | |
| 10:00 | 교중미사 | ||
| 평일미사 | 화 | 20:00 | 동절기 19:30 |
| 수 | 06:30 | ||
| 목 | 20:00 | 동절기 19:30 | |
| 금 | 06:30 | ||
| 토 | 20:00 | 특전미사, 동절기 19: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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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문화정보
가실(佳室)
본당은 경북 지역 초기 본당 중의 하나로 대구대교구 소속이며 설립일은 1895년이다. 초창기의 이름은 가실 본당으로 후에 행정구역명을 따라
낙산(洛山) 본당으로 개명되었다가 다시 가실 본당으로 변경되었다. 주보는 성녀 안나이다.
이에
조선교구장을 맡고 있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이해 초에 입국한 소세(Saucet, 蘇世德) 히폴리토 신부를 제4대 본당 신부로
임명하였고, 그는 5월에 가실로 부임하였다. 이후 가실 본당은 1911년 4월 서울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 설정됨에 따라 새 교구 소속이
되었으며, 소세 신부는 이 해 7월 3일 대구 계산동 본당의 로베르 신부가 치료차 프랑스로 출국하자마자 계산동 본당의 보좌로 임명되어 가실을
떠나 대구로 이임하였다. 그렇지만 계산동 본당의 신자들뿐만 아니라 가실 본당의 신자들도 계속 방문하였으며, 그러다가 1912년 5월 전라도
일대에서 사목하던 투르뇌(Tourneux, 呂東宣) 빅토리노 신부가 제5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와
함께 투르뇌 신부는 왜관(倭館) 지역의 전교에 힘써 1928년 2월부터 공소 신자들과 함께 성당 건축을 시작, 11월에 이를 준공하고 다음해
5월에는 왜관 본당을 분리하였다. 세 번째의 자본당인 왜관 본당의 설립은 가실 본당의 위축을 가져오게 되었다. 왜관은 새 중심지로 발전하는
추세에 있었지만 가실은 시골 본당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이에 드망즈 주교는 1933년 가실 본당을 노사제들을 위한 휴양 본당으로 설정하였다.
또 투르뇌 신부가 1935년부터 베르트랑(J. Bertrand, 韓聖年) 줄리앙 신부를 대신하여 자주 교구 당가 일을 보면서 본당 일이 종종
소홀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1943년 2월 지병으로 은퇴하여 주교관에서 휴양하던 중 사망하였다.
즉
베르트랑 신부가 다시 제8대 주임으로 부임(1945. 8)하였다가 부산 청학동 본당으로 이임(1946. 1)하면서 진주 장재리(長在里) 본당에
있던 안국목(安國牧) 마가리노 신부가 제9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안 신부가 경주 본당으로 전임(1947. 6)되면서 계산동 본당 보좌였던
신상조(申相祚) 스테파노 신부가 제10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신 신부가 1년 만에 다시 계산동 본당 보좌로 전임(1948. 6)되고,
함양 본당에 있던 김영제(金永濟) 요한 신부가 왜관 본당에 부임하여 낙산 본당의 주임을 겸하다가 낙산 본당 주임으로 임명(1949.
10)되었다. 이어 김 신부가 밀양 본당으로 전임(1951. 4)되고, 밀양에 있던 류선이(柳善伊) 요셉 신부가 제1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뮐러
신부 재임시에 본당의 활동은 매우 활발하였는데, 그 예로는 1954년 12월 8일에 개최한 본당 설정 60주년 행사, 이듬해 6월 12일 본당
최초로 실시한 성체 거동 행사를 들 수 있다. 또 이때부터 본당은 주임 신부의 이동이 적은 탓에 안정을 가져오게 되었고, 1970년대 초까지 약
1,300여 명의 신자수를 기록하였다. 그 결과 제18대 주임 이동식(李東植) 베네딕도 신부 재임기인 1968년 9월 성체회 분원을 설립했다가
1970년 8월에 이를 철수한 적이 있었다.
본당
설립 100주년을 넘어서
가실
성당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침략을 받는 아픔을 겪었지만 다행히 병원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훼손되지 않아 옛 유물과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성당 제대 한쪽에 위치한 ‘성녀 안나상’은 본당의 주보성인이기도 하지만 1924년 이전에 프랑스에서 제작되어 수입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유일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