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
관리자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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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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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을 기록한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여 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병인 대박해 때만 해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 이렇게 내포 지방에서 끌려와 옥사에 갇혀 있던 그 많은 순교 선열들을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 진영의 서문 밖으로 끌어내어 교수 · 참수 · 몰매질 · 석형 · 백지사형 · 동사형 등으로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더욱 잔인한 방법이 고안되기도 했다. 즉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어 죽이기도 하였고,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 죄인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1866년 병인년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많은 수의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으로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든 후, 한 마디 명령으로 산 사람들을 밀어 넣고 흙과 자갈을 덮어 묻어버렸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해미 지역의 외인들은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하여 ‘죄인 둠벙’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 그런데 이렇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이 불확실한 이름과 출신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을 뿐, 그 밖의 모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모두가 무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순교자들 중 홍주(홍성)와 공주 등 상급 고을로 이송된 순교자들은 이송 사실과 이름이 기록으로 남겨진 것으로 보아 그 이송된 순교자들은 해미 진영장의 독자적 처결에 있어서 사후에 문책거리가 됨직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으며, 해미 진영은 처형 후 문책의 배후 세력을 갖지 못한 서민층 신자들만을 심리나 기록 절차 없이 마구잡이로 죽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감옥터와 호야나무 높이 5미터, 길이 1,800미터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의 대지 위에 내옥 ·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조선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울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갔던 감옥은 발굴 작업 및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복원 재현되었다. 그 감옥터 옆에 있는 호야나무는 신자들을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즉 오늘도 이 호야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 줄에 움푹 패도록 옛님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 서문 밖 순교지 저자 길을 따라 서쪽 하수로에 다다르면, ‘재앙을 떨쳐내는 문’이 비껴 있다. 재앙의 씨알머리를 서쪽에 내어 버리듯이, 사학 무리를 이 문 밖으로 끌어내어 쳐 죽었다. 잡아들일 때 빼앗았던 십자가의 묵주 등을 이 문의 난간에 넣어놓고, 지나가며 밟게 하여 천주학을 버리고 목숨을 살려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임들은 성물에 머리 숙여 절을 하고, 문턱을 넘어 가서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다. 이 문의 누각에는 지성루(枳城樓)라 쓰여 있는데, 본래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해미 진영이었기 때문이지만 이 서문이란 그 임들이 가시밭 이 세상을 떠나가던 마지막 문이었다. 이 문을 나가면 그 임들을 밀어 넣고 돌로 찧던 하수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하수구를 가로 질러 놓여 있던 돌다리는 그야말로 사람 도마였고, 여기저기 시체가 쌓여 썩고 피가 땅에 젖어 남아 흐르는 곳이 서문 밖이었으니 여기서 죽은 목숨이 몇 천이나 되었는지 헤아릴 수 없어 그저 “시산혈하를 이루던 곳이었다.”라는 말만 남아 있다. ![]() 특히 잔인하게는 돌다리 위에 연약한 순교자를 서너 명의 군졸들이 들어 올려
자리개질(태질)하여 머리와 가슴을 으스러뜨리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양촌 사람 방영창 안토니오 등 수많은 분들이 순교하였다.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지져 숨을 끊어 버렸다. 이 자리개돌은 서문 밖 순교성지 일부를 확보하여 보존하다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1월 8일 해미 생매장 순교성지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서문 밖에는 현재 모조품을 준비해 두었다.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kr, 2005,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1년
12월 2일)] ![]() ![]() |
해미 고을은 조선 중기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위한 진영이 있던 곳으로 진영장이 현감을 겸해 지역을 통치하며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 해미 진영은 수많은 천주교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는데, 공식적인 박해 외에도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의 옥사에는 늘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나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자리개질 등으로 죽어갔습니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이나
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순교한 이들의 정확한 신원과 행적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수천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의 이름과 출신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생매장과 수장으로 숨져 간 진둠벙 주변에는 십자가의 길과 노천 성당 등이 조성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 읍성에는 동헌과 교우들을 가두었던 옥사가 복원되었고, 그 앞에는 고문대로 쓰던 호야나무가 남아 있습니다. 서문 밖 순교성지에는 1956년 서산 성당으로 이전하여 보존하던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 원위치를 찾아 복원되었다가 2009년 1월 다시 해미 성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고, 1989년에 건립한 순교현양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1935년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 뒷산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원래의 순교터인 해미 순교탑 앞으로 이장되었습니다. 해미 성지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신심을 기리기 위해 2003년 6월 무명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성당 뒤에는 묘지 형태의 유해참배실을 건립했습니다. 유해참배실은 2009년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2008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 고시된 해미 성지는 2015년까지 지자체와 함께 역사를 간직한 순례지로 개발할 예정입니다.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를 위해 해미 성지를 방문하여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을 갖고 해미읍성에서 폐막미사를 집전했습니다. |
미사시간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주일미사 | 일 | 11:00 | 미사 일정은 해미 순교성지 것입니다. |
평일미사 | 월 | 11:00 | |
화 | 11:00 | ||
수 | 11:00 | ||
목 | 11:00 | ||
금 | 11:00 | ||
토 | 11:00 | 후원회원들을 위한 미사 |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