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묘재(학산 공소)
관리자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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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1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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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재에는 순교자 남상교 아우구스티노가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관직을 내놓고 내려와 은거생활을 하던 유택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신앙생활에 전념하며 아들 남종삼이 찾아오면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남종삼 요한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치명을 각오하고 한양으로 가던 중 체포되어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부친 남상교도 붙잡혀 공주로, 장자 규희는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하고 처 이조이, 차남 명희와 두 딸은 경상도 창녕으로
유배되어 노비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조이도 창녕에서 순교하니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하였습니다. 남종삼 요한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순교자 남상교와 남종삼 성인의 유택이 있는 마을에는 1920년대부터 신자들이 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었고, 1938년에 목조건물의 공소를 신축하였습니다. 유택 앞에 있는 옛 공소 건물은 1955년 9월 신축하였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학산 공소는 1989년에 신축하였습니다. 또한 순교자의 후손과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1987년 유택을 보수하였고, 뒷산에 14처를 조성하였으며, 1999년 5월 6일 유택 뒤편에 성모상을 세우고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13년 10월에는 공소 옆에 교육관을 신축했습니다. |



한국의
카타콤바라 할 만한 배론 성지에서 산 하나를 넘어서면 병인년 서소문 밖에서 치명한 성 남종삼(南鐘三, 1817-1866년)이 살던 묘재가 있다.
이곳은 1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종삼 성인과 그 부친 남상교(南尙敎, 1784-1866년) 부자의 뜨거운 신앙과 애끊는 육친의 정이
넘쳐흐른다.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교회 활동은 1861년에 입국한 리델(Ridel)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친 것이나, 이전부터 이미 베르뇌(Berneux) ·
다블뤼(Daveluy) 주교 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그의 건의를 쾌히 받아들였으며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가 모두 황해도와 충청도에서 전교 여행 중이어서 약속 시간 내에 찾아내지 못했고
대원군의 초조는 분노로 바뀌었다. 얼마 후 두 주교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 이미 때는 늦어 대원군은 정권 유지의 간계로 천주교 박해를 결심했던
터였다.
이후
남종삼의 시신은 홍봉주의 시신과 함께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고, 시복을 계기로 1967년
10월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가족 묘소인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