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옥천성당

Korea Martyrs Shrine 한국의 순교 성지

옥천 옥천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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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략설명 감곡 본당에 이어 청주교구 내에 두 번째로 설립된 본당
 지번주소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158-2 
 도로주소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중앙로 91
 전화번호 (043)731-9981
 팩스번호 (043)731-9984
 홈페이지
 문화정보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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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종탑과 주보인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상.청주교구 소속 본당.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158-2 소재. 1906년 5월 20일 옥천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공소 시기와 본당 설립 
옥천(沃川) 지방 최초의 선교는 감곡(甘谷) 본당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1900-1901년 말 감곡 본당의 교세 통계표에 의하면 옥천군 장사리(長沙里)에는 신자수가 40여 명인 개경지 공소가 있었다. 안정적인 선교 활동의 결과 신자수가 꾸준히 증가하자 1903년 공주 본당 2대 주임 파스키에(P. Pasquier, 朱若瑟) 신부는 옥천 공소를 설립하였으며, 이듬해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옥천 지역이 교통의 요지로 점차 주목받게 되자 본당 설립을 계획하게 되었다.
 
1906년 교구에서는 옥천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면서 초대 주임으로 홍병철(洪秉喆) 루카 신부를 임명하였다. 홍병철 신부는 부임과 함께 당시 교우들이 갖고 있던 천주교에 대한 잘못된 특권 의식을 단속하는 등 본당의 올바른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09년 옥천읍 이문동(里門洞)에 2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였다. 이와 함께 홍병철 신부는 본당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들을 대상으로 전교 활동을 펼쳤는데, 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낮은 천장과 긴 평면 구조를 갖고 있는 성당 내부. 제대 옆으로는 1991년 라틴 십자형으로 증축한 공간이 있고, 그 한 편에 유물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다.그러나 1913년 홍병철 신부가 공소 순회 도중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2대 주임으로 이종순(李鍾順) 요셉 신부가 부임하였다. 성탄절에 대전 지역 신자 3명의 방문을 통해 대전 지역 신앙 공동체에 대하여 알게 된 이종순 신부는, 대전 지역의 신앙 공동체가 앞으로 크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1914년 11월 비룡(飛龍)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이에 옥천 본당은 비룡 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되었고 1919년 11월 대전(大田, 현 대흥동) 본당의 설립과 함께 신설 본당 관할이 되었다.
 
1928년 9월 3대 주임으로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옥천 공소는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나, 활성화되지 못하고 1943년 3월 다시 대전 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되었다. 이는 옥천 지역이 극도로 침체되어 전교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늘어나는 타 지역의 성당수에 비례하여 사제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1948년 7대 주임으로 김영근(金永根) 베드로 신부가 부임함에 따라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는데, 김영근 신부는 옥천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삼양리 신시가지에 25평 규모의 새 성당을 완공하여 본당을 이전한 후, 본당의 활성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성당 옆마당 풍경. 넓은 잔디 광장 주위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1953년 9월부터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충청북도 지역을 담당하게 됨에 따라, 8대 주임으로 메리놀회 소속의 페티프렌(R. Petipren, 邊聖行) 신부가 부임하였다. 1956년 4월 24일 페티프렌 신부는 옥천읍에서 가장 큰 건물인 100여 평의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으며, 본당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을 위한 ‘성모의원’(나환우 진료소)과 ‘천당의 문’ 양로원을 설립하였다.
 
한편 다양한 활동의 결과 인근 지역의 신자수가 증가하자 1955년 10월 보은(報恩) 본당, 1956년 6월 영동(永同) 본당을 분리 · 설립하였다. 9대 주임 그레이그(H. Graig, 奇厚根) 후고 신부 또한 1957년 10월 황간(黃澗) 본당을 분리하였으며, 이듬해 청주교구의 설정과 함께 본당은 대전교구에서 청주교구로 소속이 바뀌었다. 1959년 1월 예수 성심 시녀회의 분원을 마련한 데 이어 9월에 청산(靑山) 본당을 분리 · 설립하였다.
 
12대 주임으로 부임한 호프만(V. Hoffman, 河) 신부는 1964년에 성모의원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 2층 병원(512평)을 신축하였으며, 나환우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치료함으로서 범위를 확대하였다. 1972년 4월 ‘천당의 문’ 양로원은 청주 경로 수녀회 성심원과 합병되었다.
 
소화 데레사 교육관.본당의 발전과 안정  14대 주임 데크만(L. Decman, 馬) 신부는 1972년 5월 4층 건물(504평)을 완공하고 옥천 성모병원을 가톨릭 의대 부속병원으로 개원하였다. 본당의 관할이 메리놀회에서 교구로 이관됨에 따라 16대 주임으로 부임한 박용수(朴容秀) 바오로 신부는 전교 방법의 하나로 1977년 성모유치원을 개원하였고, 1981년 10월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이어 17대 주임 서정혁(徐廷赫) 프란치스코 신부는 1986년 12월 본당 설립 80주년을 맞아 2층 규모의 ‘성녀 소화 데레사 교육관’(145평)과 수녀원(45평)을 완공하고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8대 주임 이범현(李範玄) 토마스 신부는 초대 주임 홍병철 신부의 생애와 본당 초기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갖고 본당사 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본당사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와 함께 신자들의 성체 신심을 강조하여 ‘가르멜산 성체 조배회’를 도입하였으며, 1989년 제1회 남부지구 성체대회를 개최하였다. 19대 주임 류한영(柳漢永) 베드로 신부는 1991년 11월 일자형의 건물을 열십자형으로 증 · 개축하면서 110평을 늘렸으며, 모임 장소로 이용할 강당(60평)도 마련하였다.
 
1996년 축복식을 갖고 개원한 소화 어린이집.21대 주임 이승용(李承鎔) 마태오 신부는 본당 설립 90주년 기념사업으로 취학 전 어린이의 교육 시설이 부족한 상황을 고려하여 소화 어린이 집 개원을 계획한 뒤 건물을 완공하고, 1996년 5월 20일 어린이 집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함께 본당 전 신자를 대상으로 1년 동안 성서 40주간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어 22대 주임으로 부임한 박치영(朴治英) 안드레아 신부는 1998년 5월 31일 160세대 440명의 교적을 이관하여 이원(伊院) 본당을 분리 · 설립하였다.
 
23대 주임 경덕수(慶悳秀) 레오 신부 때인 2002년 2월 28일 성당 건물은 1940년대 충북 지역에서 유일하게 건축된 성당이며 다른 성당 건축의 전형이 되었으므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7호로 등록되었다. 2006년 설립 100주년을 맞은 옥천 성당은 인근에 많은 본당을 분리한 모(母) 본당으로서 모범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2002년,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1년 12월 2일)]
 
 
자랑스런 신앙유산 - 청주교구 옥천 성당
 
시 ‘향수’로 국민시인이 된 정지용 프란치스코의 고향 옥천(沃川). 그 비옥한 들녘에 국내에 몇 안 되는 ‘100년 성당’이 있다. 1906년 본당으로 설정되어 충북 남부 3군과 청주 · 대전 교회, 특히 대전 본당(현 대흥동 주교좌본당)의 모태가 된 옥천 본당이다.
 
1956년 건립되어 1991년 증축된 현 성당 건물이 2002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신앙의 옥토(沃土)’를 일궈가는 옥천 성당은 특히 가톨릭교회 근대문화유산들 중에서 제일 먼저 2002년 2월 28일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교회사적(敎會史蹟)이어서 각별하다. 본당 설립 100년이 넘은 옥천 성당은 그리 잘 알려진 곳이 아니다. 교회 건축미도 그리 빼어나지 않다. 6 · 25 전쟁 직후 3년 만에 지었으니 현대 교회건축에 가깝다. 하지만 지용의 문학적 향기가 밴 옥천을 끌어안은 듯한 풍광이나 성당 정원의 정취는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옥천이 신앙의 불모지에서 옥토로 바뀌어가는 여정에는 청주 출신 첫 사제이자 한국 천주교회 10번째 사제인 홍병철(1874-1913년) 루카 초대 주임신부가 그 중심에 있다. 페낭 신학교,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거쳐 1899년 사제품을 받은 홍병철 신부는 1906년 5월 옥천 본당에 부임, 1913년 40살에 선종하기까지 본당의 초석을 놓았다. 사목자로서 ‘가난’의 영성을 실천했고, “사사성경”(四史聖經) 번역에 참여했으며, 천주가사 발굴에도 열심이었다. 기도서인 “성가 찬미경”도 집필했다.
 
성당 제대. 1991년 일자형에서 십자형으로 증축된 공간이 보인다.홍병철 신부가 1906년 옥천읍 이문동에 세운 15칸 규모 한옥성당 겸 사제관이나 1909년 옥천읍 죽향리 154번지에 세운 72.7㎡ 규모 한옥성당은 이제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홍병철 신부 사후 공소 격하(1914년), 본당 승격(1928), 공소 격하(1943년) 등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1948년에 다시 본당으로 승격하면서 7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영근 신부는 그해 7월 일제가 신사 터 기반공사를 하다 포기한 현 삼양리 부지를 매입하여 85.6㎡ 규모의 구 성당을 신축했다. 이 성당은 현 성당 신축 이후 성모의원으로 쓰여지다가 1972년 철거되었다.
 
현 성당은 1956년 8대 주임인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로이 페티프렌 신부가 지은 유사 고딕식 성당이 모태이다. 건립 이후 종탑 상부 첨탑 마감재를 함석에서 기와로 바꾸고 주출입문을 교체하는 등 변모를 거쳐 1991년 장방형 성당을 라틴십자형으로 증축해 현재에 이른다. 지상 1층(종탑부 3층)에 건축 연면적 698.17㎡, 철근콘크리트 벽돌조적조 성당이다.
 
제대 옆 십자형으로 증축된 공간에 마련된 본당 유물 전시장.문화재청은 옥천 성당에 대한 실측조사보고서를 통해 “1950년대에 지은 충북 성당 건축물로는 유일할 뿐 아니라 해방 이후 지방 성당의 전형적 형태이며 교회건축의 변화과정을 살피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드러나지 않는 들꽃에 둘러싸인 아담한 성당 외관도 아름답지만 성당 내 전례 공간 또한 아늑하다. 나지막한 장방형 천장에 50년대에 프랑스에서 수입한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주제 유리화로 둘러싼 제대, 유물 전시공간, 신자석 등이 한데 어우러지는 신앙적 향기가 은은하다.
 
1956년 신축 당시 들여온 프랑스제 종은 아직도 청아하게 울려 펴져 ‘아름다운 종소리’로 명성이 높다. 특히 100년 성당 발자취를 함축하는 제대 왼쪽 유물전시공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별도 유물관이 마련됐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그래도 소규모나마 신앙 유산들이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성당 뒷마당의 성모자상.성당 내 전시 유물은 옛 교리문답집, 구 성당 감실 · 종 · 십자고상, 옛 공소 제대, 윤예원(3대 주임) 신부가 쓰던 가죽 털모자, 본당 전 · 현 수호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유해가 들어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제대 성석(聖石), 유화로 제작한 십자가의 길 14처 등을 망라한다. 초기 감실과 성상, 성화, 14처, 교리서 등을 지금과 견줘 그 조형적 차이나 신앙적 숨결을 느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성당을 나서면 은은한 ‘가을의 몸짓’을 엿볼 수 있는 오밀조밀한 정원이 나온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최봉자 수녀가 제작한 성모상과 십자가의 길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소나무와 어우러져 편안한 기도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정원을 둘러싸고 사제관과 드넓은 성당 마당 겸 주차장, 소화 데레사(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교육회관, 강당, 소화 어린이 집 등이 돌아가며 나타난다. 특히 교육회관 겸 수녀원에는 본당 수호자인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관련 흑백 사진과 그림이 100여 점이나 전시되어 본당 수호자의 의미를 신자들에게 깨우쳐주고 있다.
 
성당 외관. 사진 왼쪽 제대 방면에 십자형으로 증축한 공간이 보인다.
 
2006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옥천 성당은 문화재청과 옥천군의 지원을 받아 속이 부식된 종탑을 새로 세우고, 성당 벽면과 지붕 기와를 연한 코발트색과 밤색으로 칠했으며, 성당 주차장으로 쓰던 마당에 야외제대를 새로 꾸몄다. 이어서 홍병철 신부 묘역을 정비하고, 2008년 옥천군과 협력해 성당 지붕을 원형대로 기와에서 함석(철판)으로 변경했으며 “청주교구 옥천본당 100년사” 또한 발간했다. [출처 : 평화신문, 2007년 11월 4일, 오세택 기자의 기사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1년 12월 2일)]
옥천 지방 최초의 선교는 감곡 본당 부이용 신부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신자수가 꾸준히 증가하자 1903년 공주 본당 파스키에 신부에 의해 옥천 공소가 설립되었습니다. 경부선 개통 이후 옥천 지방이 교통의 요지로 주목받으면서 1906년 5월 본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홍병철 신부는 본당의 초석을 놓았으며 1909년 옥천읍 이문동에 2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했습니다. 2대 주임 이종순 신부는 대전 지역 신앙 공동체의 발전 가능성을 보고 1914년 11월 비룡 본당을 설립하여 부임함으로써 옥천 본당은 그 관할 공소가 되었고, 1919년 11월 대전(현 대흥동) 본당의 설립과 함께 그 관할이 되었습니다.

그 후 다시 본당이 되었다가 공소가 되는 과정을 거쳐 1948년 김영근 신부의 부임으로 비로소 본당으로서 안정을 찾았습니다. 김영근 신부는 옥천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삼양리 신시가지에 25평 규모의 새 성당을 완공하여 본당을 이전했습니다. 1953년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충청북도 지역을 담당하면서 부임한 페티프렌 신부는 1956년 4월 옥천읍에서 가장 큰 건물인 100여 평의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했으며, 본당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을 위한 ‘성모의원’(나환우 진료소)과 ‘천당의 문’ 양로원을 설립했습니다.

1955년 이후 보은, 영동, 황간 등 많은 본당을 분가한 옥천 성당은 1958년 청주대목구 설정으로 대전교구에서 청주교구로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1991년 11월 류한영 신부는 일자형의 성당 건물을 열십자형으로 증 · 개축했고, 1996년 5월 이승용 신부는 본당 설립 90주년 기념사업으로 소화 어린이 집을 완공해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2002년 2월 옥천 성당은 1950년대에 지은 충북 성당 건축물로 유일할 뿐 아니라 해방 이후 다른 성당 건축의 전형이 된 가치를 인정받아 가톨릭교회 근대문화유산 중에서 처음으로 등록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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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교중미사
19:30  청년미사
평일미사 06:00  
19:30  
19: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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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특전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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