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옥봉동 성당
관리자
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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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2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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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봉동(玉峯洞)
본당은 마산교구 소속 본당으로 1926년 5월 10일 문산(文山) 본당 소속의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그리스도의 도움이신
마리아이다. 설립 당시에는 진주(晋州) 본당이었으나, 1967년 현재의 본당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전사 및 공소
시대 진주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경로는 대략 두 갈래이다. 하나는 경북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 낙동강을 따라
남하하여 동쪽 사봉면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전라도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 지리산과 덕유산을 넘어 남강을 따라 내려와 문산에
복음을 전파한 경우이다. 이러한 두 경로를 통해 진주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60년대 초였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진주에 사는 양반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과 중인 구한선(타대오)이 순교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문산 지역에는 신자 최(崔) 루도비코가 전라도 달구산에서 그곳으로 이사 와 살면서부터
복음이 전해졌다고 한다. 그는 이웃에 살고 있던 강(姜)문주와 교분이 두터웠는데, 함안에 살고 있던 강문주의 사위 구(具)필경이 처가에 내왕하는
동안 최 루도비코에게 감화를 받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함안으로 돌아가 본가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전교하였는데, 병인박해 때 순교한 그의 아들
구한선이 문산으로 이사 와 활발히 전교하였다. 구한선은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던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와 함께 1865년경 거제도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문산에 뿌리를 내린 천주교 신앙은 다시 진주의 비라실(현 진주시 장재동) 인동 장씨(仁同張氏) 집안으로 전해졌다. 문산의 교우 제 씨(諸氏)는
1871년 딸을 진주의 비라실에 사는 외인 장익금(張益今)에게 출가시켰다. 삼 형제 중 막내인 장익금이 부인의 권유로 처가에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그의 전교로 두 형제들도 모두 신자가 되었다. 병인박해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진주의 교우촌들은 1880년대에는 이미 다시 안정을
찾았다. 문산 소촌(召村, 현 진양군 문산면 소문리) 교우촌과 진주의 비라실 교우촌은 박해 이후 경상도를 전담하게 된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에 의해 1883년에 모두 공소로 설정되었다. 이들 진주 지역 공소들은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가 1890년 초에 부산
절영도에 정착하면서 부산 본당(정식 명칭은 초량 본당) 소속이 되었다.
경상도 서부 지역의 신자들은 신자수의 증가로 본당 신설의 필요성이 요구되고, 1895년
진주가 진주부로 승격되어 관찰사가 거주하는 경남의 중심 도시가 되자 기회 있을 때마다 진주에 신부 모시기를 원하였고, 1897년 11월경에는
진주읍에 집 한 채를 마련하여 이를 주교에게 보고하였으며, 1898년 7월에는 진주 · 양산 · 삼가 · 곤양 회장들이 연명으로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신부 파견을 요청했다. 아울러 1898년 부산 본당 3대 주임으로 부임한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는 1899년에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교세가 확대되어 나가는 것을 보고는 진주에 새 본당을 설립하는 것이 좋겠다고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청원하였다.
1899년 뮈텔 주교는 타케 신부의 청원을 받아들여 그에게 진주 본당을 창설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부산 본당을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신부에게 맡기고, 그 해 6월 진주 본당을 설립하여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진주 본당이 술집과 접대부와 아전들만이 살고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본당 신자들도 별로 없는데다가 아전들이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신자들 가운데 부정을 저지르는 자가 생겨 갈수록 전교 활동이 어렵게 되자, 타케 신부는 본당 이전을 결심하게
되었다.
먼저
비라실로 거처를 옮겨 일주일가량 머물다가 1900년 6월 29일 개항장으로 장래가 유망한 마산포로 가서 마산 본당을 설립하였다. 이에 따라 진주
본당은 공소로 전락하였으며, 진주 지역의 여러 공소는 다시 마산 본당 소속이 되었다. 1903년 조선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방문하였을 당시
진주 공소에는 신자가 두 집뿐이었다고 한다. 1905년 문산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고 초대 주임으로 줄리앙(M. Julien, 權裕良) 신부가
부임함에 따라 진주 공소는 다시 문산 본당에 소속되었다.
1911년 4월 8일 조선교구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이 분리되어 새로 대구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드망즈 주교가 부임함에 따라 문산 본당과 그 소속 공소들은 대구 대목구에 속하게 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미국의 한
열심한 신자의 성금으로 진주 읍내의 동북쪽에 위치한 옥봉동 산 밑, 일명 순천당이라고 불리는 곳의 땅 120평을 구입하여 공소를 마련하였다. 이
공소의 초대 회장 이낙종(李樂鍾, 스테파노)은 전교에 모든 힘을 쏟았고, 그의 맏아들 이상석(가브리엘)은 가톨릭 청년회를 조직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또 이들 부자가 1920년 공소에 ‘해성학원’을 개설하여 육영 사업을 전개하면서 전교에 정성을 기울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입교하게
되었다.
설립과
발전 이낙종 · 상석 부자 등 많은 신자들의 정성으로 1923년 본당 설정의 기초가 될 목조 건물(18평)을
신축하여 그 해 11월 26일 완공과 함께 봉헌식을 가졌다. 마침내 1926년 5월 10일 이 공소는 진주(현 옥봉동) 본당으로 승격되고 초대
주임으로 정수길(鄭水吉) 요셉 신부가 임명되었다. 정수길 신부는 1926년 8월 본당에서 운영하던 ‘해성학원’을 정규 4년제의 야간 소학교로
개편하고 새로 ‘해성유치원’을 개설하였다.
2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계룡(金季龍) 베드로 신부는 나날이 늘어나는 신자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도록 1932년에 성당에 인접한 대지 119평을
매입하여 50평 규모의 붉은 벽돌로 된 근대식 새 성당을 건립하여 이듬해 9월 봉헌식을 거행하였으며, 1935년에는 사천(泗川) 공소를
설립하였다. 3대 주임으로 부임한 박삼세(朴三世) 요셉 신부는 1943년 11월 사제관을 건립하였고,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장병룡(張丙龍) 요한
신부는 1946년 6월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을 마련하여 사목 활동을 돕게 하였으며, 2층으로 된 사제관을 콘크리트로 신축하였다. 5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철희(李哲熙) 바오로 신부는 1949년 4월 일제 탄압으로 폐쇄되었던 유치원을 장휘(글라라) 수녀와 함께 ‘성모유치원’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개원하여 이 지역 유아 교육의 요람이 되게 하였으며, 1952년에는 6 · 25 한국 전쟁 때 파손된 성당 건물을 전면 보수하고
40평을 더 확장하여 개축하였다.
6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두호(金斗湖) 알로이시오 신부는 1953년 본당 앞의 대지
1,000여 평을 매입하여 지금의 본당이 될 기틀을 닦고 사무실 · 수녀원 건물을 신축하였으며, 관할 구역 안에 있는 공소와 다른 본당의 발전도
아울러 도모하였다. 즉, 1953년 8월 하동읍 읍내동 1287번지에 소재한 대지 219평을 매입하여 해양동에 있는 하동(河洞) 공소를
읍내동으로 옮겼고, 이듬해 3월에 선구동 선창가의 판잣집에서 삼천포(三千浦) 공소를 열고 5세대를 모아 첫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1956년
6월에는 선구동 116번지의 구 삼천포 읍사무소 건물과 대지 364평을 매입한 뒤 다음해 6월 55평의 강당을 신축하였다. 또한 1957년
2월에는 사천읍 수석리에 소재한 대지 1,250평을 매입하여 장래 사천 본당 설립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같은 해에 장재동(長在洞) 본당도
신축하였다.
1957년
1월 21일 부산 대목구가 대구 대목구로부터 분리 · 신설됨에 따라 진주 본당은 다시 부산 대목구에 속하게 되었다. 부산 대목구의
최재선(崔再善, 요한) 주교의 권유로 1957년 6월 20일부터 프란치스코회가 서부 경남의 일부인 진주 · 사천 · 삼천포 · 하동과 산청군
일부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 해 6월 20일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주포니(C. Giupponi, 주) 콘스탄시오 신부가
7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주포니 신부는 8대 주임 최성근 베드로 신부가 잠시 본당을 맡은 기간을 제외하고 다시
9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67년 1월까지 10여 년 동안 본당 사목을 맡아 교육 · 자선 · 사회 사업에 진력하였다. 주포니 신부는 관할 구역
안에 있는 공소와 다른 본당의 발전도 함께 도모하였다. 즉, 공소의 활성화를 위해 1959년 3월 단성 · 시안 · 삼장 · 단계 · 청현 ·
하정 · 방목 · 자양 · 송강 · 장죽 등의 공소를 신설하였고, 그 해 6월에 하동 공소의 택지 94평을 추가로 매입하여 공소 대지를 총
313평으로 늘린 뒤 11월에 공소 건물을 수리하였으며, 1959년 9월에는 장죽리 185번지의 부지 65평을 매입한 다음 12월에 39평
규모의 공소 강당을 건립하였다. 또한 1963년에 의령 화정 공소를 신축하였고, 1965년 9월에는 하동 근교의 나환우촌 ‘영신원’ 안에 공소를
설립하고 10월에 건물 한 동을 매입하여 공소 건물을 확장하였다.
아울러 주포니 신부 재임 기간에 여러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 · 분리되었다. 1957년
6월 20일 삼천포 공소가, 1965년 12월 27일에 하동 공소가 각각 본당으로 승격 · 분리되었고, 1959년 10월에는 사천 공소가
준본당으로 승격된 뒤 1965년 6월 본당으로 승격 · 분리되었으며, 1965년 3월에는 칠암동(七岩洞) 본당이 진주 본당에서 분리 ·
설정되었다.
또한
주포니 신부는 1959년에 경남 산청군 산청면 내리 91번지의 대지 28,000평을 구입하여 6월 18일 ‘성심원’(성심인애병원의 전신)을
창립하여 진주시 구생원(나환우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천주교 신자 60명을 이곳에 이주시켰고, 1963년에는 진주시 칠암동 78번지의 땅
1,553평을 매입하여 목조 건물 6동을 신축한 뒤 ‘성 프란치스코의 집’이라는 양로원을 개설하고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의 수녀들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였다. 아울러 사제가 없는 장재동 본당의 미사와 성사를 빠짐없이 집전하였고, 1961년에는 60만 원을 들여 장재동 본당의
각종 부속 건물들을 보수해 주었으며, 신부가 공석 중인 문산 본당의 사목도 사천 본당의 라우리올라(G. Lauriola, 安) 신부와 격주로
담당하였다.
1966년 마산교구가 부산교구로부터 분리 · 설정됨에 따라 진주 본당은 프란치스코회
관할에서 다시 교구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10대 주임으로 박정일(朴正一) 미카엘 신부가 임명되었는데, 이때 본당 이름도 옥봉동 본당으로
바뀌었다. 박정일 신부는 성당 건물을 30평 증축하여 지하 교리실을 신설하고 성당 내부를 현재 모습 그대로 개조했다. 특히 교부금 제도를
폐지하고 주일금으로 대신하면서 신자들의 동참을 유도하고 청년회를 비롯한 신심 단체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1대 주임으로 임명된 김덕신(金德信) 요셉 신부는 1970년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신용 협동조합을 만들어 신자들로 하여금 상부상조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나동 교회 묘지를 조성하였다. 12대 주임 정삼규(鄭三圭) 요한 신부는
사봉의 순교자 묘지 조성과 순교 복자 현양 대회 개최 등을 통해 신자들의 신심을 다지고자 노력하였고, 신자수의 증가에 따라 1977년 12월
28일 봉곡동(鳳谷洞) 본당을 분리 · 설립하였다. 15대 주임으로 부임한 박주선(朴周善) 안토니오 신부는 1984년 교육 회관(330평)을
신축하여 다양한 신앙 교육을 실시하였고, 1985년 11월에는 교구에서 처음으로 성체 조배실을 마련하였으며, 옥종 공소 부지 224평을 기증받아
확장하였다. 아울러 본당 설정 60주년 행사를 주관하였고, 고성 이화 공원 묘지 안에 본당 묘지를 새로 확보하였다.
16대
주임으로 임명된 김차규(金且奎) 필립보 신부는 ‘농어촌 선교 후원회’를 활성화시켜 농촌 지역의 선교 활동을 강화하였고, 1990년 4월에는 본당
구역 안에 있는 민가 53평을 매입하여 구내를 정비하고 사무실과 주 회의실을 신축 · 증설하였다. 17대 주임 서정술(徐正戌) 프란치스코 신부는
1994년에 낡은 수녀원을 헐고 신축하였으며, 성모 신심 묵상회와 성체 신심 묵상회를 실시하여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18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중규(鄭中奎) 글라로 신부는 1999년에 “옥봉 성당 칠십년사”(玉峯聖堂七十年史)를 간행하고 성당 분위기를 활기차게
바꾸는 등 서부 경남의 중심 본당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신자들과 더불어 노력하였다. [출처 : 서종태,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성당을 들어서면 초입에 서 있는 예수성심상이 먼저 환대하는 옥봉동 성당은 뾰족한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건물로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조의 작은 건물은 초기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근현대 성당 건축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준다. 1997년 부임한 정중규 신부는 대대적인 성당 미화작업을 진행하여 창문 유리화를 교체하고 마당 조경도 새롭게 단장했다.
1933년에 봉헌된 성당이 모태가 되어 몇 차례 보수와 증축을 거친 현 옥봉동 성당은 2005년 4월 15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최종수정 2016년 1월
21일] |
경북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 낙동강을 따라
남하한 신자들과 전라도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 지리산과 덕유산을 넘어 남강을 따라 내려와 문산에 정착한 신자들에 의해 진주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 두 경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60년대 초였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진주에 사는
정찬문 안토니오와 구한선 타대오가 순교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병인박해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진주의 교우촌들은 1880년대에 이미
안정을 찾았고, 문산의 소촌과 진주의 비라실 교우촌은 1883년 로베르 신부에 의해 공소로 설정되었습니다. 경상도 서부 지역 신자가 증가하자 뮈텔 주교는 1899년 부산 본당의 타케 신부에게 진주에 본당을 설립하도록 했습니다. 타케 신부는 그 해 6월 진주 본당을 설립했지만 신자도 별로 없고 아전들이 노골적으로 방해로 전교활동이 어렵게 되자 본당 이전을 결심했습니다. 1900년 개항장으로 장래가 유망한 마산포로 가서 마산 본당을 설립하면서 진주 본당은 공소로 전락했습니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정되면서 드망즈 주교는 진주읍내의 옥봉동 산 밑에 공소를 마련했고, 이 공소의 초대회장 이낙종과 그의 아들 이상석의 전교와 신자들의 정성으로 1923년 본당 설정의 기초가 될 목조건물을 신축했습니다. 마침내 1926년 5월 이 공소는 진주(현 옥봉동) 본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932년 늘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대지를 추가 매입하여 붉은 벽돌로 된 근대식 새 성당을 건립해 이듬해 9월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1957년 신설 부산대목구에 속하게 된 진주 본당은 최재선 주교의 권유로 프란치스코회가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고, 1966년 마산교구의 신설로 다시 교구 관할이 되었습니다. 이때 본당 이름도 옥봉동으로 바뀌었고, 성당 건물 또한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성당을 들어서면 초입에 서 있는 예수성심상이 먼저 환대하는 옥봉동 성당은 뾰족한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건물로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조의 작은 건물은 초기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근현대 성당 건축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1997년 부임한 정중규 신부는 대대적인 성당 미화작업을 진행하여 창문 유리화를 교체하고, 마당 조경을 새롭게 하며, 본당 70년사도 간행했습니다. 1933년에 봉헌된 성당이 모태가 되어 몇 차례 보수와 증축을 거친 현 옥봉동 성당은 2005년 4월 등록문화재 제15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미사시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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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 교중미사 | ||
평일미사 | 월 | 06:30 | |
화 | 19:30 | ||
수 | 10:00 | ||
19:30 | |||
목 | 10:00 | ||
19:30 | |||
금 | 1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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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 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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