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성당 (구 구포동 성당)
관리자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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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0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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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 시대 안성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이미 박해 시대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를 전후해서는 이웃의 죽산(竹山)과 안성군 소촌만면(所村萬面, 현 대덕면)의 모산리와 명당리, 서리면(西里面, 현 안성시)의 계촌 등지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 중 몇몇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러나 이들 공동체는 박해로 와해되어 버렸고, 훗날 순교자들의 후손이나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신자들이 모여 새로 교우촌을 이루게 되었다. 기록에서 이들 교우촌의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1883년으로, 당시 충청도와 경기도 남부 지역을 담당하던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가 그 해 안성 지역을 방문하고 ‘바울 공소’(현 안성시 미양면 馬山里의 岩洞)를 설립하였다. 두세 신부는 이때 죽산과 직산(稷山) 등지에도 공소를 설립하였고, 다음해에는 ‘궁말 공소’(현 충남 천안시 성환읍 安宮里)를, 1887년에는 ‘선바위 공소’(현 안성시 금광면 梧山里의 立岩)를 설립하였다.
본당 설립과 정착 안성 지역의 신자들이 본당 설립 운동을 펴게 된 것은 뮈텔 주교가 이곳을 방문한 뒤였다. 당시 이 지역의 신앙 중심지는 바울 공소와 질구비 공소(현 안성시 미양면 後坪里), 갈전리 공소(현 안성시 미양면 葛田里) 등지였으며, 안성읍에는 한 가족만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차 설립될 본당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읍내에 성당과 사제관이 건립되어야만 했고, 이에 신자들은 드비즈 신부와 협의하여 구포리에 있던 현재의 성당터를 매입하고, 그 자리에 있던 기와집 21칸을 성당(8칸)으로 개조한 다음, 1900년 9월 드비즈 신부의 집전 아래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기본 여건이 갖추어지게 되자 드비즈 신부는 즉시 뮈텔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본당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그 결과 1900년 10월 19일자로 안성 본당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한편 공베르 신부는 여러 해 동안 성당 신축 기금을 모금해 왔는데, 1922년에 어느 정도 기금이 모아지게 되자 신자들의 협력을 얻어 3월에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 8월 15일 성모 몽소 승천 대축일에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리고 10월 4일 서울교구의 보좌 주교로 있던 드브레(Devred, 兪世俊) 주교의 집전으로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당(건평 80평, 경기도 기념물 82호)은 한식(내부)과 바실리카 양식(외부)을 절충한 형태로, 초기 성당사에서 나타나는 토착화의 양식을 잘 반영하였다. 당시 공베르 신부는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의 설계를 토대로 중국인 기술자의 힘을 빌려 이를 완공하였는데, 기와와 돌 등은 안성군 보개면 동안리에 있던 유교 강당을 헌 자료를 이용하였고, 목재는 압록강변과 서산 지방의 것을 이용하였다. 그는 또 2년 뒤인 1924년 1월, 안법 학교 개교 15주년을 맞아 ‘안성 천주교 소년회’를 창립하였다.
성장과 분할 공베르 신부는 당시 안성 일대뿐만 아니라 천안군 목천면 일부, 진천군 백곡면 일부, 평택과 그 인근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중 1914년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진위(振威) 군청이 자리잡게 된 병남면 평택리(현 평택시) 인근의 통복(通伏) 공소가 장차 발전할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이에 공베르 신부는 1926년 12월 6일부터 수원군 태장면 병점(餠店, 본래 갓등이 본당 소속)에 근거지를 두고 전교 활동을 하던 몰리마르(Molimard, 矣) 신부와 협의하여 현 평택 성당 위치에 부지를 매입하고, 1928년 초 몰리마르 신부를 이곳으로 이전토록 하였다. 이로써 ‘평택 본당’은 안성 본당에서 분할된 최초의 자본당이 되었다. 그러다가 공베르 신부는 1932년 9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되고, 미리내 본당에 있던 뤼카(F. Lucas, 陸加恩) 프란치스코 신부가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가 1934년 6월 28일에 사망함으로써 그해 8월, 황해도 은율 본당에 있던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구포동 본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전개하면서 2000년 1월 1일 본당 명칭을 안성 본당으로 변경하여 옛 이름을 되찾았다. ‘100년에서 다시 태어나는 100년’을 주제로 다양한 기념행사를 가진 안성 본당은 2000년 10월 3일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식 및 기념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초대 주임인 공 안토니오 신부 흉상 제막식, 로고스(Logos) 탑과 미래를 준비하는 십자가 축복식도 함께 이루어졌다. 11m 높이의 로고스 탑은 안성 지역에 하느님의 ‘말씀’이 뿌리내린 지 100주년을 기념하는 탑으로 관련 자료들을 탑 속에 넣어 100년 타임캡슐 봉안식도 가졌다. 100주년 기념성당 옆에 설치되어 본당 설립 200주년을 준비하는 ‘미래의 십자가’는 총길이 18m에 무게만도 13t에 이른다.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성당은 경기도 기념물 제82호인 붉은 벽돌의 옛 성당 모습을 살리기 위해 전혀 다른 모습의 노출 콘크리트 기법의 흰색 건물로 건립되었다. 윤성호 교수가 설계한 총건평 840여평, 지하 1층 지상 2층 기념성당은 옛 성당과 절묘한 신구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옛 성당에서는 ‘빛의 은은함’이 느껴진다면 새 성당은 오히려 ‘빛의 흐름’을 강조했다. 제대 위에 사각형의 천창(天窓)을 배치하여 말씀을 뜻하는 빛의 생명력을 강조했고, 성당 입구 상부 벽에는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세 개의 사각형 창을, 신자석 옆에도 창을 두어 성당이 일종의 ‘빛통’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도록 했다.
안성 성당하면 초대 주임 공베르 신부와 포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01년 성당 마당에 무심코 심은 독일산 포도 묘목이 의외로 탐스런 과실을 맺자 공베르 신부는 안성 지역이 포도재배에 적합한 기후 및 토양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선교활동과 함께 지역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도 큰 힘을 기울이던 공베르 신부는 여러 차례 프랑스를 오가며 안성의 토질과 기후에 적합한 포도 종자를 찾았고, 이를 적극 보급해 안성포도의 효시가 되었다. 또 성당 주변의 토지 50만 평을 매입하여 이웃들이 경작할 수 있도록 임대하며 지역민 전체를 품어 안았다. 안성에서 32년 동안 신자들을 돌보던 공베르 신부는 6 ․ 25 동란 때 체포되어 납북,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다가 1950년 11월 12일 동사하였다. 한편 안성문화원은 2012년 5월 공베르 신부를 ‘안성을 빛낸 인물’로 선정하고 흉상 제막식을 가졌다. [출처 : 관련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3년 4월 30일)]
박해시대에 이미 복음이 전파된 안성 지역은 1866년 병인박해를 전후해서 여러 곳에 신자들이 거주했습니다. 그러나 박해로 공동체가 와해되고 훗날 순교자들의 후손이나 다른 지역 신자들이 이주해오면서 새로 교우촌이 형성되었습니다. 1883년 두세 신부가 안성 지역을 방문하여 바울 공소를 설립하고, 죽산과 직산 그리고 궁말과 선바위 공소를 차례로 설립했습니다. 1900년 1월 뮈텔 주교가 이 지역을 방문한 후 본당 설립 운동이 시작되어 안성읍내에 현 부지를 매입한 후 기와집을 성당으로 개조하여 그해 9월 드비즈 신부의 집전으로 낙성식을 거행했습니다. 이어 10월 19일 안성 본당이 설립되었습니다.
초대주임으로 임명된 공베르 신부는 1909년 사립 초등학교인 안법학교(현 안법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자비로 운영했고, 1912년 여자부를 신설하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교사수녀를 초빙했습니다. 또 공베르 신부는 1919년 3 · 1 운동에 참여했다가 왜경에게 쫓기던 사람들을 성당으로 받아들이고 프랑스 국기를 게양해 왜경의 진입을 막기도 했고, 프랑스에서 모금한 기금으로 전답을 매입하여 소작 농민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가난한 농민들을 도왔으며, 흉년이 들면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등 빈민 구제 활동도 벌였습니다.
1922년 공베르 신부는 신자들의 협력을 얻어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해 그해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첫미사를 봉헌하고, 10월 4일 드브레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이 성당은 한식(내부)과 바실리카 양식(외부)을 절충한 형태로 토착화의 양식을 잘 보여줍니다. 1936년 제4대 주임 이복영 신부는 안법학교 교사를 증축하고 4년제에서 6년제 초등학교로 발전시켰으며, 다음해 4월 정규 보통학교로 인가받았습니다. 1947년 9월 김제근 신부는 안법중학교를 인가받아 개교하였고, 1955년 임세빈 신부는 고딕식 벽돌조로 성당 종탑부를 증축하고 독일에서 주문한 종을 설치했습니다.
안성 본당은 1970년에 대천동 본당을 분할하면서 구포동 본당으로 개명되었고, 1985년 6월 성당이 경기도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성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했습니다.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전개하면서 2000년 1월 1일 본당명을 안성 본당으로 다시 변경하고, 그해 10월 3일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식 및 기념성당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성당은 붉은 벽돌의 옛 성당 모습을 살리기 위해 전혀 다른 노출 콘크리트 기법의 흰색 건물로 건립되었습니다. 또한 2005년 5월 안성 성당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초대주임으로 임명된 공베르 신부는 1909년 사립 초등학교인 안법학교(현 안법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자비로 운영했고, 1912년 여자부를 신설하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교사수녀를 초빙했습니다. 또 공베르 신부는 1919년 3 · 1 운동에 참여했다가 왜경에게 쫓기던 사람들을 성당으로 받아들이고 프랑스 국기를 게양해 왜경의 진입을 막기도 했고, 프랑스에서 모금한 기금으로 전답을 매입하여 소작 농민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가난한 농민들을 도왔으며, 흉년이 들면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등 빈민 구제 활동도 벌였습니다.
1922년 공베르 신부는 신자들의 협력을 얻어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해 그해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첫미사를 봉헌하고, 10월 4일 드브레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이 성당은 한식(내부)과 바실리카 양식(외부)을 절충한 형태로 토착화의 양식을 잘 보여줍니다. 1936년 제4대 주임 이복영 신부는 안법학교 교사를 증축하고 4년제에서 6년제 초등학교로 발전시켰으며, 다음해 4월 정규 보통학교로 인가받았습니다. 1947년 9월 김제근 신부는 안법중학교를 인가받아 개교하였고, 1955년 임세빈 신부는 고딕식 벽돌조로 성당 종탑부를 증축하고 독일에서 주문한 종을 설치했습니다.
안성 본당은 1970년에 대천동 본당을 분할하면서 구포동 본당으로 개명되었고, 1985년 6월 성당이 경기도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성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했습니다.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전개하면서 2000년 1월 1일 본당명을 안성 본당으로 다시 변경하고, 그해 10월 3일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식 및 기념성당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성당은 붉은 벽돌의 옛 성당 모습을 살리기 위해 전혀 다른 노출 콘크리트 기법의 흰색 건물로 건립되었습니다. 또한 2005년 5월 안성 성당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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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미사 | 월 | 06: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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