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현 성당
관리자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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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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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현 일대에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살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 지방은 청계산과 광교산 등 높은 산들과 깊은 계곡이 있고 수목이 울창하여 박해를 피해 살 길을 찾던 천주교 신자들에게 최적의 장소였다. 따라서 박해를 전후하여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하우현으로 낙향한 전교회장 김기호(金起浩, 요한)는 1901년에 지은 “봉교자술”(奉敎自述)에서 “하우현에는 군난을 전후하여 가난한 교우들이 모여 살았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찍부터 교우촌이 헝성된 이 지방은 박해 때에 여러 명의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는 광주 의일리(義一理, 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 체포되어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남한산성에서 참수되었고, 1845년 9월에는 하우현에서 살던 김준원(金俊遠, 아니체토)이 체포되어 12월에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또한 광주 묘론리(卯論里 혹은 山畓里, 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에서 머물던 볼리외(B. L. Beaulieu, 徐沒禮) 신부는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청계산 중턱 둔토리 굴아위 동굴에 숨어 지내다 체포되어 1866년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볼리외 신부는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한덕운 토마스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본당 설정 및 성쇠 하우현 공소는 1900년 9월경에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주임으로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였다. 설립 당시 관할구역은 광주, 용인, 과천 등지였으며, 16개의 공소에 신자수는 1,105명이었다. 샤플랭(O. Chapelain) 신부는 기존의 공소 강당을 성당으로 사용하는 한편, 사제관을 신축하는 등 본당의 기틀을 잡아 나갔으나 신자들과의 갈등으로 해임되고, 1906년 3월 르 각(C. Le Gac)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11년 4월에 갓등이 본당의 알릭스 신부가 프랑스로 휴가를 떠나자 수원으로 거처를 옮겨 두 본당을 함께 관리하다가, 1912년 4월 27일 페랭(P. Perrin) 신부가 하우현 본당의 3대 주임으로 임명되면서 갓등이 본당만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페랭 신부는 부임 2년 만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소집되어 프랑스로 떠났고, 이에 따라 하우현 본당은 행주 본당의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갓등이 본당을 돌보면서 함께 사목하였다.

1953년 12월 구천우(具天祐, 요셉) 신부가 8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하우현 공소는 다시 본당이 되었다. 그러나 구 신부는 산간 지역에 위치한 하우현보다 발전 가능성이 있는 안양 읍내로 본당을 옮기려고 하였고, 결국 1954년 3월 7일에 안양에 성당을 세운 뒤 9월 7일에 안양(현 중앙) 본당 초대 신부로 부임하였다. 이로써 하우현 본당은 안양 본당 관할 공수가 되었고, 성당과 사제관은 그대로 보존되어 신부들의 휴양지로 제공되었다.
한편 은퇴 후 하우현에서 휴양하던 김영근(金永根, 베드로) 신부는 하우현 성당이 퇴락하여 붕괴 위험이 있음을 보고 1965년에 미군 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원조받아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는데, 이때 구로동(현 구로3동) 본당 주임이던 스피스 신부가 김영근 신부와 미군 부대 사이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 가운데 1975년 12월 안양 본당으로부터 군포(현 호계동) 본당이 분리 설정되면서 하우현 공소는 군포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한편 1906년에 샤플랭 신부가 세운 옛 사제관은 그 몸체가 서양식 석조 양식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전통 한국식이다. 20세기 초반에 성당 사제관을 건립하면서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기법이 혼용된 것은 매우 드문 경우로, 평면 및 구조ㆍ의장 등이 갖는 건축사적 가치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한편 사제관 앞마당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의 기념비와 FRP 소재의 동상이 있었는데, 2010년 태풍 콘파스로 인해 크게 파손되자 청동 소재를 이용해 새 성인상(엄종환 요셉 작)을 복원 제작해 그해 10월 31일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볼리외 신부는 주로 하우현 인근에서 사목하다가 인근 청계산의 둔토리 동굴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최종수정 2016년 2월 18일]

하우현 성당은 이미 1800년대 초반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앙인들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88년 갓등이 본당 설립과 함께 갓등이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습니다. 갓등이 본당 2대 주임인 알릭스 신부님은 교우들이 공소 강당도 없이 교우집에서 공소예절을 하는 것을 보고 강당 신축을 추진하여 1894년 초가목조강당 10칸을 건립했습니다.1900년 본당으로 승격된 후 1954년 다시 안양 본당 공소로 전환되었고, 1965년 은퇴 후 하우현에서 휴양하던 김영근 베드로 신부님이 성당의 붕괴 위험을 알고 미군 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원조받아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습니다. 1975년 군포(현 호계동) 본당 관할공소로 변경되었다가 1978년 하우현 공소가 본당으로 부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993년 하우현 공소 건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2001년 1월에는 초대주임인 샤플랭 신부가 세운 사제관이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어 2004년과 2005년에 사제관 보수 공사와 조경 공사를 실시하였고, 2012년 성당 뒤편에 성모동산과 묵주기도 길 등을 조성하였습니다. 1906년에 건립된 사제관은 그 몸체가 서양식 석조 양식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전통 한국식으로 20세기 초반에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기법이 혼용된 드문 경우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제관 앞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서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의 기념비와 동상이 있습니다. 성인께서 주로 하우현 인근에서 사목하시다가 청계산의 둔토리 동굴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셨기 때문입니다.
1993년 하우현 공소 건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2001년 1월에는 초대주임인 샤플랭 신부가 세운 사제관이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어 2004년과 2005년에 사제관 보수 공사와 조경 공사를 실시하였고, 2012년 성당 뒤편에 성모동산과 묵주기도 길 등을 조성하였습니다. 1906년에 건립된 사제관은 그 몸체가 서양식 석조 양식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전통 한국식으로 20세기 초반에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기법이 혼용된 드문 경우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제관 앞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서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의 기념비와 동상이 있습니다. 성인께서 주로 하우현 인근에서 사목하시다가 청계산의 둔토리 동굴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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