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반주골 (이승훈 베드로 묘)

Korea Martyrs Shrine 한국의 순교 성지

인천 반주골 (이승훈 베드로 묘)

관리자 0 8741 0
 간략설명묘 주인은 천진암으로
 지번주소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 산 132-1(남동구 정수사업소 뒷산) 
 전화번호(032)464-0888
 팩스번호(032)461-0888
 홈페이지
 전자메일mansu1@caincheon.or.kr
 관련기관만수1동 성당    
 관련주소인천시 남동구 하촌로 66
 문화정보인천시 기념물 제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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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골 이승훈 베드로 묘 전경. 이승훈의 유해는 1981년 천진암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묘역으로 이장되었다.‘月落在天水上地盡(월락재천 수상지진)’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인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년)의 묘 앞에 서면 그가 1801년 신유박해로 참수되기 직전에 읊었던 한시(漢詩)가 마음속에 떠오른다.

“‘달은 비록 서산에 지더라도 하늘에 남아 있음’과 같이 남이 비록 나더러 배교했다 말하더라도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대로 남아 있고 ‘물이 비록 못 위로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함 같이’ 내 목숨을 앗아 가도 내 신앙은 변함이 없다.”

인간적 약점으로 인해 여러 차례 천주를 부인한 이승훈은 이승을 하직하는 자리에서 스스로에 대한 애절한 후회와 자책을 이 한 구절 시구(詩句) 속에 절절히 담았다. 그리고 그는 이 몇 마디 한시를 통해 결코 자신의 신앙은 변함이 없음을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한국 천주교 선각자 이승훈 베드로 묘비.비록 몇 차례의 배교를 했다 해도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조금도 감소되지 않는다.

이승훈은 평창(平昌) 이씨 가문의 부친 이동욱(李東郁)과 모친 여주(驪州) 이씨 사이에서 1756년 태어났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당대의 석학 이벽(李壁)과도 교분을 갖게 된 그는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 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Grammont, 梁東材)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영세 후 천주교 교리 서적, 십자고상, 상본 등을 갖고 귀국해 이벽, 정약종 · 약전 · 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며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는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첫 번째 배교를 했다.

이승훈 베드로 묘소 아래 있는 3남 순교자 이신규 마티아의 묘소.하지만 그는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하였다. 그 후 1790년 북경에 밀사로 파견됐던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 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의 명을 전하자 조상 제사 문제로 다시 교회를 떠났다.

그 후에도 이승훈은 여러 차례 배교를 했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로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후 4월 8일 다른 6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비록 그는 이처럼 여러 번 배교했으나 이 땅에 복음의 첫 번째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고,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셋째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자 이연구 ‧ 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다.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반주골에 안장되었던 이승훈의 유해가 천진암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묘역으로 이장되어 정약종, 권철신 · 일신 형제, 이벽 옆에 나란히 모셔졌다. 반주골의 이승훈 묘는 2011년 12월 29일 인천시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었다. 인천교구는 2014년 1월 24일 교구 순교성지 성역화 사업의 중심이 될 성지개발후원회를 발족하며, 이승훈 베드로 묘역 일대를 역사문화기념관과 순례길을 갖춘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3월 13일)]

이승훈 베드로 묘역.이승훈 베드로 묘 아랫단에는 삼남 순교자 이신규 마티아와 장남 이택규의 묘(오른쪽)가 있다.


모바일용 요약 설명
반주골에는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자 창립 선조의 한 명인 이승훈 베드로의 묘와 장남 이택규와 3남 이신규 마티아 순교자의 묘가 있습니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의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대의 석학들과 함께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 말 동지사를 따라 북경으로 가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습니다.

영세 후 교리서와 성물 등을 갖고 귀국해 강학회 동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명례방 집회를 갖고 가성직제도를 주도하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과 조상 제사 문제, 부모의 적극적인 반대 등으로 잠시 교회를 떠나기도 했으나 다시 돌아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습니다.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반주골에 안장되었던 이승훈의 유해는 천진암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묘역으로 이장되어 정약종, 권철신 · 일신 형제, 이벽 옆에 나란히 모셔졌습니다. 이승훈 묘는 2011년 12월 인천시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인천교구는 2014년 1월에는 묘역 일대를 역사문화기념관과 순례길 등을 갖춘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미사시간
미사구분요일시간기타사항
주일미사06:00 미사 일정은 만수1동 성당 것입니다.
09:00 
11:00 교중미사
19:30 
21:00 
평일미사06:00 
19:30 
10:00 
19:30 
10:00 
10:00 
16:00 초등부미사
19:30 중고등부미사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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