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현(崔昌顯) 요한은 1759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입정동에서 살았다. 호는 ‘관천’이었으며, 1795년에 순교한 최인길(마티아)은 비록 그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집안
아저씨뻘이 된다.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한 요한은 즉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였다. 글을 잘 알았던 그는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을 조선말로 번역하는 데
열중하였다. 이때 그가 번역한 책들은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평온한 마음과 조심스러운 행동을 지녔으며,
모든 일을 부지런하면서도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요한은 그 후 지도층 신자들에 의해 총회장
역할을 하도록 추대었다. 그는 언제나 교우들이 타당하게 교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쳤고, 교회 일을 열심히 도왔다. 특히 그의 교리 강론은
유명하였으며, 덕망도 뛰어나 모든 교우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믿게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 이후 일부 지도층
신자들이 교회를 멀리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요한만은 꿋꿋하게 교회를 지켜나갔다. 그는 동료들과 의논하여 성직자를 영입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이
일을 앞장서서 추진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요한은 정식으로 회장에 임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주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고 그로부터 성사를 받았으며, 언제나 미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정성스럽게 준비하였다. 또 그는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직후, 최창현
요한은 다른 교우의 집으로 잠시 피신하였다. 그러나 병 때문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가 밀고자가 데리고 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처음에 그는
포도청으로 끌려갔으나,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있었으므로 즉시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의금부에서의 처음 문초 때에 요한은 일시
마음이 약해져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일을 밀고하지는 않았다.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는데, 형벌 가운데서 다시 용맹한 마음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내 그는 전날의 약했던 마음을 진실히 뉘우쳤고,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저로서는 지목하여 말할 교우가 없으니 죽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제 천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날에
천주를 배반하였던 것을 통절히 뉘우치면서 죽고자 할 따름입니다. 지목하여 말할 교우는 없습니다.”
최창현 요한은 끝으로 ‘자신이
천주교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