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 경기도 광주(마재), 참수, 한양 서소문밖 18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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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7 15:08
18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지위 (신분,
직업) : 회장, 양반
출생연도 : 1760년
출생지 : 경기도 광주(마재)
순교일 : 1801. 4.
8
연령 : 41세
순교형식 : 참수
순교지 : 한양 서소문밖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760~1801년)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는 1760년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과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아우구스티노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후인 1786년에 형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이후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된 아우구스티노는
세례를 받고 교리 연구나 가족들을 가르치는 데 전심하였다. 그러다가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부터 조금씩 교회를 멀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를 실천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우구스티노의 열심은 더욱
빛을 발하였다. 인근 지역의 신자들과 자주 교류하였으며, 몇몇 교우들을 자신의 집에 받아들여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고, 직접 교회 일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의 교리 지식은 교우들 가운데서 아주 뛰어나게 되었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아우구스티노는 자주 한양으로 올라가 성사를 받았고, 신부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또 오랫동안의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2권을 완성하였는데, 이 책은 주 신부의 인가를 얻어 교우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주 신부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한 뒤 아우구스티노를 그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0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고향
인근에서 박해가 시작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발생하면서 교회 전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체포자의
명단에 그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특히 박해 초기에 그의 책 상자가 관청에 압수되자, 조정에서는 즉시 그를 체포해 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그는 음력 2월 11일에 체포되어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체포 이튿날부터 아우구스티노는 엄한 형벌과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미 순교할 원의를 갖고 있던 그에게는 어떠한 유혹과 형벌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으며, 오로지 천주교 교리가 올바르다는 것만을 설명하는 데 노력하였다.
“천주를 높이 받들고 섬기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천주는 천지의 큰 임금이요 큰 아버지입니다. 천주를 섬기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천지의 죄인이며,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박해자들은 아우구스티노를 굴복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교리는 오히려 박해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결국 조정에서는 의금부의 사형 선고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아우구스티노는 체포된 지 15일 만에 형장으로 정해진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사형수가
타는 수레에 올라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의 울음은 진정한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고, 당신들의 즐거운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이오.”
형장에 이르자 곧 참수형이 시작되었다. 이때 아우구스티노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