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민(洪樂敏) 루카는 1751년 충청도
예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와 한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리고 1776년에는 양근의 유명한 학자 권철신(암브로시오)의 제자가 되었으며,
4년 뒤에는 진사가 되고, 178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서게 되었다. 1839년의 순교자 홍재영(프로타시오)은 그의 아들이다.
그에 앞서 루카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또 한때는 지도층 신자의 일원으로서 다른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한
적도 있었다. 이는 당시의 신자들이 성직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교리와 교회법을 잘 알지 못하던 상황에서 행한 잘못이었다. 다행히 이러한
행위는 오래 가지 않았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난 뒤, 루카는
임금의 명에 따라 천주교 신앙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기도 생활을
계속하였고,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재(齋)를 지키기도 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다음해, 루카는 성사 받을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을묘박해가 일어나 체포되자 두려운 나머지 천주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여기에서
그는 “천주교의 폐해는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므로 철저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홍낙민 루카는 다시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神主)도 모시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천주교를 멀리한
것처럼 보였다.
2년 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루카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된 후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두려운 나머지 처음부터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십계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라고 가르친 것은 옳다.”고 대답하였으며, 결코 동료들을 밀고하지 않았다.
혹독한 문초와 형벌이 계속되는 동안 루카는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하여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이전에 보이지 않던 용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재판관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답변하였다.
“저는 천주교 신앙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억지로 사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10년
동안 이를 멀리하였으니 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제는 천주교를 버릴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지도 않겠습니다.”
이처럼 굳게
신앙을 증거한 루카는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