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운영하며
생활하던 정인혁(鄭仁赫) 타대오는, 1790년 무렵 최필제(베드로)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형제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제사도 폐지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타대오는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의 형제들과 몇몇 동료들은 엄한 형벌에 굴복하였으나, 타대오만은 형벌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자 관리들은 그의 가족들이 그를 회유할 수 있도록 3일 동안의 기한을 두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타대오가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맏형은
형조로 들어가 ‘우리 집안에서는 앞으로 누구도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하였으며, 형조에서는 이를 믿고 타대오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더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더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이에 가족들이
그를 말리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최필공(토마스) 형제, 김이우(바르나바) 등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타대오는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고 성사도 받았다. 또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회원이 되어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교우들에게 한글로 번역한 교회 서적들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정인혁 타대오는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각각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은
조금도 입밖에 내지 않고 자신의 신앙만을 고백하였다. 그런 다음 최필제 등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형조에서 타대오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묵은 악행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월 7일에는 동료들과 함께
신부를 데려다 미사를 봉헌하고 천주교 서적을 외웠으며, 여러 사람을 나쁜 길로 인도하고 온 세상을 미혹시켰다.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