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韓德運)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바로 그 이듬해 윤지충은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그 후 토마스는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성사의 은총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주 신부를 만나려고 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1800년 10월, 토마스는 좀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럴 때면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다음해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교회와 교우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토마스는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루가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이때 그는 놀라고 비통한 마음으로 그 시신에 애도를 표하였다. 그런 다음 그의 아들
홍재영(프로타시오)을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홍재영은 그 후 다시 신앙을 되찾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1839년에 순교하였다. 또 토마스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사실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한덕운 토마스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고,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밀고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토마스가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