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양반 집안 출신이다. 교회 창설 주역들의 스승이요 학문으로
이름이 높던 권철신(암브로시오)은 그의 큰아버지였으며,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그의 아버지였다. 훗날 권상문은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1769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세바스티아노는 일찍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아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또 장성한 뒤에는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이웃에 사는 윤유일(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로 생부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죽임을 당하자 세바스티아노는 마음이 약해져 한때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로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였고, 성사를 받기 위해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주 신부를 방문하고 모임을 가졌으며, 얼마 후에는 고향인 양근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1795년의 을묘박해로 주 신부가 피신 생활을 하게 되자, 3일 동안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유숙시키면서 교리를
배웠다.
1800년 6월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세바스티아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잠시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전에 한 말을 취소하였으며, 아낌없이 가해지는 형벌을 받으며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그의 최후 진술을 들은 후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하였다.
“생부 권일신이 사망한 이후에도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아울러
요사한 말과 글을 오로지 대중을 미혹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동시에 형조에서는 ‘권상문을 고향으로 이송하여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
세바스티아노의 고향인 양근 주민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