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조숙(趙淑)
베드로는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숙’은 그의 관명이다. 이후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양친과 함께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성장해 감에 따라 베드로는 출중한 재능을
보였고, 성품 또한 착하고 친절하였으며, 나이에 비해 아주 점잖았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 때문에 신앙 생활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7세 때 권 데레사를 아내로 맞이하면서였다.
혼인날 밤, 아내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베드로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후 베드로 부부는 남매처럼 지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그들의 신심은 날로 깊어져 기도와 복음 전파, 고신극기 행위가 일상이 되었으며, 가난하게 살면서도 남을 위한 애긍에
열중하게 되었다. 이렇게 15년을 생활하는 동안, 베드로는 처음의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조숙 베드로 부부는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바오로가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북경을 왕래할 때마다 필요한 뒷바라지는 모두 그들 부부의 몫이었다. 정
바오로는 교회 일을 위해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한양에 있는 베드로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온갖 준비를 하였다. 당시 고
바르바라(혹은 막달레나)라는 과부가 그 집에 살면서 그들 부부를 도와주었다.
그러던 중 정 바오로가 다시 한 번 북경에
갔을 때, 포졸들이 수색 과정에서 우연히 베드로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이내 포졸들은 그의 집으로 몰려들어 그를 체포하였다.
이때 아내 데레사는 자원하여 남편을 따라나섰고, 고 바르바라도 그들 부부와 함께 투옥되었다. 그때가 1817년 3월
말경이었다.
문초가 시작되자, 관장은 조숙 베드로 부부를
유혹하면서 ‘배교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혹독한 형벌을 꿋꿋하게 참아냈다. 관장은 몇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들 부부의 신앙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고통스러운 옥살이 중에도 베드로 부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특히 아내 데레사는 남편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순교를
권면하였다.
베드로 부부와 고 바르바라는 이렇게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였고,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격을 얻게 되었으니,
그들 셋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것은 1819년 8월 10일(음력 6월 20일) 이후로,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33세였다. 교우들은 한 달이
지나서야 그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