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는 경기도 여주
부곡(현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함으로써 신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부인이고, 정순매(바르바라)는
그의 여동생이다.
바르나바는 입교 후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양근에 살던 윤운혜와 혼인을 하였는데, 이때 천주교 신자가 아닌 그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혼인 문서는
주고받을 수 없었다. 또 집안에서는 교리의 가르침을 지킬 수도 없었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바르나바는 한양으로 올라가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교리도 배웠다. 그리고 신부의 명에 따라 김건순(요사팟)에게 편지를 전하였으며, 고향
인근에 교리를 전하면서 비신자를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바르나바의 부모는 여전히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제사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그는 1799년 아내와 함께 여주를 떠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런 다음 자신의 집 한편에
교회 집회소를 짓고 주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이곳을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의 여동생 정순매도 그들 부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왔다.
본래 상당한 학식을 지니고 있던 바르나바는
교회 서적을 베껴 신자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 아내와 함께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이나 묵주 등을 제작하여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주었고, 가까운 교우들과 자주 만나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기도 모임을 갖곤 하였다. 그들 부부는 자식에게도 일찍부터 교리를 가르쳐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처형
윤점혜(아가타)가 체포되자, 바르나바는 자기 부부도 머지않아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박해 초기에 그는 이미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있었고, 2월에는 그의 집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아내 윤운혜가 체포되었다.
당시 정광수 바르나바는 한양과 지방을
오가면서 이리저리 피신해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포졸들이 수사망을 좁혀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이상의 피신을 단념하고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다. 그때가 1801년 9월이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바르나바는 여러 차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신자들을 밀고하라는 명령도 거부하였다. 그런 다음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여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바르나바가 형조에서 마지막으로 진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양반의 후손으로, 나라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졌습니다. 천주교 신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주문모 신부를 아버지처럼 생각하였습니다.……또 천주교 성물을 만들어 곳곳에
배포하였고, 교우들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노력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