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애(韓新愛) 아가타는 충청도 보령에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며, 장성한 뒤 한양에 살던 조례산의 후처로 들어가 살았다. 그러다가 1795~1796년경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전교 덕택으로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가타는 전처의 딸과 함께 열심히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런 다음 강완숙의 집을 왕래하면서 정복혜(칸디다) 등과 함께 교회 일을 도왔고, 자신의 종 소명을 강완숙의
집으로 보내 교리를 배우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1800년 여름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아가타는 그 동안 다른 가족과 종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천주교에 입교시킬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열심하고 교리에 밝은 남자
교우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우선 종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반면에 그녀는
김연이(율리아나)를 비롯하여 많은 여성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강완숙과 함께 여성 공동체를 이끌어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정복혜가
천주교 서적과 성물들을 거두어 오자 아가타는 이를 자신의 집 곳간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그녀의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알려지면서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한신애 아가타는 형조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당하였지만,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강완숙?김연이 등 동료 8명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형조에서 그녀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신애는 천주교에 빠져 이미 여러 해 동안 실천해 왔으며,……강완숙과 체결하여 주문모를 찾아보고
세례와 세례명을 받았으면서도 이를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각처의 남녀 무리들을 집으로 불러들였고, 서적과 교회 물건들을
곳간에 숨겨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체포된 후에는 ‘스스로 지은 죄를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