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張)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성 장주기(요셉)의 6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 생활을 위해 이곳 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당시 배티에는 토마스의 인척으로 생각되는 장 시몬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이때부터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면서
하나 있는 아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이 무렵 가까운 인척과 친구들은 그의 본심이 순량한 탓에 언제나 그에 대해 말할 때면 ‘착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시작된 후,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의 세간을 돌려주어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안되어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은 문초와 형벌 때에 다시 영장이 “천주교를 배반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묻자, 여전히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윽고 토마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청주시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토마스는 대자 되는 사람이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5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