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 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 것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비웃기만 하였다. 그는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그 후 베드로는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서야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을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스승 정약종은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를 조롱하였음에도 그의 열심을 칭찬해 주면서 차츰 신앙의 길로 인도해
나갔다.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그는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에 불과했을지라도 조용삼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는 즉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자, 박해자들은 화가 나서 더욱 세게
매질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박해자들은 그의 부친을 끌어내다가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부친을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전처럼 그의 마음을 꺾을 수 있으리라 믿고는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무렵 조용삼 베드로는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으며, 이후로는 착한 행동과
아름다운 말로 여러 신자들을 감동시켰다.
베드로는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받아낼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지막 형벌 때에 그는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