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복(姜景福) 수산나는 1762년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궁녀가 되었으며, 순교할 때까지 동정으로 생활하였다. 그녀가 살던 집은 ‘양제궁’이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폐궁’(궁궐에서
쫓겨난 왕실의 친족이 거처하던 집이라는 뜻)이라고도 불렀다. 그 집의 주인은 송 마리아와 그녀의 며느리 신 마리아였다. 이들은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주문모(야고보) 신부나 여회장 강완숙(골룸바)과 자주 왕래해 오고 있었다.
1798년 무렵 집주인 송 마리아는 강경복
수산나를 불러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 주면서 이를 믿도록 권유하였다. 이때부터 수산나는 다른 궁녀들과 함께 교리를 배우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또 집주인들과 함께 자주 강완숙의 집으로 가서 주문모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나 신앙 집회에 참석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주 신부로부터
영세를 하게 된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01년 2월 신유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주문모 신부는 노비 남구월의 안내를 받아 양제궁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수산나는 어머니가 사는 집에 갔다가 우연히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찾으러 다닌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양제궁으로 가서 이 소식을 전하였다. 이 때문에 주 신부는 다행히 그곳을 빠져 나와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주 신부가 피신한 뒤 수산나도 양제궁을 몰래
빠져 나와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뒤따라 온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수산나는 즉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 굴하지 아니하고, “이미 천주교에 깊이 빠져 있으므로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포도청에서는 그녀를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이송하였으며, 그녀는 이곳에서 더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진 탓에 잠시 마음이 약해져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
의금부에서는 이러한 진술을 듣자 수산나를
형조로 내려보냈다. 그러자 그녀는 의금부에서 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것을 크게 뉘우치면서 다시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박해자들이 주문모 신부를
밀고하고 마음을 돌이켜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이제 신앙을 위해 형벌과 죽음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문초가 끝나자 다음과 같이 마지막으로 신앙을 고백하였다.
“저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서 이를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하였으며, 양제궁에 거처하면서 주문모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이 갈수록 굳어져 왔으니, 형벌을 당해
죽는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신앙을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수산나는 마침내 강완숙 등 동료 8명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