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黃日光)
시몬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아주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그에게 이러한 생활을 보상해 주기 위해 놀랄 만한 지능과
열렬한 마음과 매우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을 주셨다.
1792년 무렵, 시몬은 홍산 땅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에 우연히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접하자마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더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다.
교우들은 시몬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애덕으로 감싸주었다. 양반 집에서까지도 그는 모든 교우들과 똑같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그는 농담조로 이렇게 이야기하곤
하였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1800년 2월 시몬은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 살고 있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회장의 이웃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황사영(알렉시오), 김한빈(베드로) 등 여러 교우들과 자주 교류하였다. 이제 그의 열심은 날로 더해져 모든 이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그 후 아우구스티노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하자, 시몬도 아우와 함께 한양 정동으로 이주한 뒤 땔나무를 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또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기쁨도 얻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황일광
시몬은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이후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굳건하게 참아냈을 뿐만 아니라, 재판관의 추상같은 호령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교를 ‘성스러운 종교’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천주교 신앙을 올바른 길로 생각하여 깊이 빠졌습니다. 이제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어찌
배교하여 천주교 신앙을 저버리겠습니까?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그 결과 시몬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조정에서는 이와 동시에 ‘황일광을 고향으로 보내 참수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시몬은 고향인 홍주로 이송되었다.
이때 그는 걸을 수조차 없어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본래의 명랑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또 아내와 아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그를 도우려고
따라오자, 그들로 인해 어떤 유혹을 당할까 두려워 절대로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홍주에 도착하는 즉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는데,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