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方)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면천의 ‘여’
고을 태생으로 감사의 비장(裨將)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교우들 사이에는 ‘방 비장’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우연히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누구보다도 빨리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정산필(베드로) 회장과 박취득(라우렌시오), 원시보(야고보) 등과 자주
만나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였다.
교리를 실천하는 데 비상한 열심을 가졌던
프란치스코는 교우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게 되었다.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으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 그들과 같이 순교하기를 간절히
열망하였다.
그러던 중 1797년의 정사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프란치스코도 다음해 홍주에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많은 형벌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은 교우 두 명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방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기쁨에 빛나는 얼굴로
천주와 동정 마리아께 감사를 드리고 나서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이지만, 관장이
이렇게 후한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섭리의 은혜인데, 어째서 당신들은 슬퍼하고 풀이 죽어 있소.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오. 만일 우리가 천당을 얻을
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또 어떤 기회를 기대할 수 있겠소.”
이때 천주께서 방 프란치스코의 권고와 격려에 효력을
부여해 주셨다. 그 결과 그의 두 동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스스로 뉘우쳤고, 오래지 않아 거룩한 기쁨을 같이 하였다. 그들 셋은 함께 홍주
읍내에서 순교하였는데, 순교일은 1799년 1월 21일(음력 1798년 12월 16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