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 5000㎞ 대장정(10) 육도포ㆍ혼춘ㆍ도문본당
관리자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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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4 15:17
[연길교구 설정 80돌 특별기획] 연길 5000㎞ 대장정(10) 육도포ㆍ혼춘ㆍ도문본당
복잡한 지정학적 위치 만큼 혼란스런 교회역사 지녀
1930년대 폐쇄된 육도포성당, 흔적없이 벌판만
화려했던 과거 혼춘성당은 현재 500여 명 공동체
도문성당 터도 개발에 사라져…공소가 명맥 이어
조ㆍ중ㆍ러 3국 국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방천(防川, 팡촨)에 선다. 도문(圖們, 투먼)ㆍ혼춘(琿春, 훈춘)시와 경신(敬信, 징신)진을 육도포(六道泡, 류또포우) 마을을 거쳐온 참이다. 해질녘 두만강가에 서니 비안개 사이로 함북 선봉군 조산리와 녹둔도가 아스라하다. 1587년 당시 이순신(1545~98) 장군이 여진족 손에서 지켜낸 녹둔도는 현재 러시아령으로 밟을 수 없는 땅이 됐다. 열강에 만신창이로 찢긴 겨레의 땅, 그 운명을 떠올리자니 비감하기 짝이 없다.
▲ 육도포,혼춘,도문본당 위치도 |
▲ 조ㆍ중ㆍ러 3국 국경에서 바라본 두만강 너머로 함북 선봉군과 녹둔도가 아스라하다. 철책 넘어 두만강은 평화롭로 매혹적 풍경을 자아내지만, 3국의 첨예한 이해가 엇갈리는 요충지다. |
#육도포본당의 터전은 풀밭으로 바뀌고
엄태준(혼춘본당 주임) 신부의 안내에도 육도포성당 터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물어물어 혼춘시 경신진 육도포 마을로 향했다. 그나마 '육도포'라는 땅이름이 남아있어 다행히 성당 터를 찾을 수 있었다. 1934년 성당과 사제관이 중국 공산당 침탈로 전소됐고 교우촌도 쇠락을 거듭했지만, 1972년 용산호변에서 평지로 옮아간 육도포는 그대로 잔존해 있었던 것.
수소문 끝에 만난 함북 경원 출신의 도상협(70)씨는 "1945년초 소련군이 탱크를 몰고 지나가며 불에 탄 성당 잔해마저 다 무너졌고, 성당 석재는 육도포촌을 새로 건설하는데 썼다"며 일행을 원래 성당 터로 안내했다. 자신이 어렸을 때도 석재만 남아있었다고 말한 그는 육도포 공소는 1942년에 폐쇄됐고 "지금은 천주교회 공동체가 남아있지 않다"고 전했다.
육도포본당의 옛 터전은 용산호변 서쪽이었다. 야트막한 산등성이만 넘으면 러시아땅 용산호변에는 "경신 바람이 소 머리를 깬다"는 말 그대로 거센 바람만 불어올 뿐 어디에서도 성당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육도포는 1905년께 복음이 들어와 1907년 원산본당에서 13명이 브레(A. Bret)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오랜 공동체였다. 이후 1909년에는 100여 명의 세례자를 내고 공소 또한 7곳이나 됐다. 1923년에는 원산대목구장 사우어(B. Sauer) 주교가 초대 주임에 퀴겔겐(C. Kugelgen) 신부를 임명, 본당으로 설정됐고 바인거(M. Bainger)ㆍ되르플러(E. Doerfler)ㆍ트라버(H. Traber) 신부 등이 전교와 해성학교를 통한 교육사업을 병행, 교세가 크게 신장된다. 그러나 마적과 공산군 침탈로 1932년 트라버 신부가 함북 경흥으로 숙소를 옮기며 혼춘본당 관할이 됐다가 1934년에는 본당이 폐쇄된다.
#옛 혼춘성당 터에는 빌딩이 지어지고
혼춘성당과 그 관할 해성학교 터에는 상성(上城)국제빌딩 신축이 한창이다. 1946년 본당이 폐쇄된 뒤 그 터전에 중국중앙은행인 런민(人民)은행과 사원주택으로 쓰여지다 지금은 재개발 바람이 불어 성당은 흔적도 없다. 그 자리가 현재의 혼춘시제1소학 맞은편으로, 성당 및 부속건축물 부지가 3만3058㎡(1만 평)에 이르던 혼춘성당은 교회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웃한 연변 덕성법률사무소 건물에 올라가 5층 복도에서 내려다보니 옛 영화를 가늠할 수 있다. 1933년 구 일본 영사관 북쪽 부지에 독일과 이탈리아 수도원에서 만주국 화폐로 10만 원을 빌려 이듬해 완공한 혼춘성당은 당시 이 일대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혔으며,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병원, 학교, 기타 부속건물 등 교회건축물이 총 7채나 됐다.
옛 혼춘본당의 활력은 교회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1924년 퀴겔겐 신부가 혼춘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을 때 신자가 929명, 공소 또한 16곳에 이르렀다. 이어 2대 주임 되르플러 신부가 1934년 학교와 사제관, 수녀원을 신축하고 연길 성 십자가 수녀회(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수도자들을 초빙해 진료소와 여성 대상 야학을 개설하면서 혼춘본당은 1936년 신자 수 1244명, 공소 수 22곳으로 비약적 신장세를 보인다.
이에 연길교구 첫 조선인 사제인 김충무 신부가 혼춘본당에 보좌로 파견돼 되르플러 신부와 함께 활동했다. 그러나 1946년 5월 사제와 수도자들이 중국 공산당에 체포되면서 혼춘본당은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만다.
▲ 1988년 새로 지은 혼춘성당 마당에서 성모의 밤 행사를 갖고 있는 혼춘본당 여성 신자와 수도자들. |
그 명맥은 1979년 개혁ㆍ개방 이후 혼춘본당이 잇고 있다. 혼춘시 춘성로 우의골목 28호에 자리한 현 성당은 1988년 6월에 당시 중국 인민폐로 14만 원을 들여 992㎡(300평) 규모로 신축됐다. 혼춘본당의 현 교세는 500여 명으로, 조선이주민이 이 중 절반인 250여 명이다.
#옛 도문본당 터전 역시 층집으로 재개발되고
옛 도문본당 터를 찾다가 류충렬(74)씨를 만났다. 도문시 제2소학교 앞 빈터를 도문성당 자리로 알고 찾아갔다가 낭패를 겪은 뒤였다. 그 자리는 1980년대 도문공소가 있던 자리라는 게 현지인들의 전언이었다. 해방 전 도문성당에 놀러가곤 했다는 류씨의 안내로 찾아간 옛 도문성당은 현재 시내 서남쪽 남산 언덕 신화가 12위 6조 1호였다. 현지에선 회막동으로 불리는 조선이주민 마을로, 1947년 도문본당이 폐쇄되면서 중국인민해방군 동북민주련군 제10종대가 주둔하다 도문위생검역소 및 직원 주택으로 쓰여졌고 이제는 층집(아파트) 재개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부지가 207㎡(63평)이던 옛 성당 터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황량했고, 폐가는 오갈 데 없는 빈민들이 차지했다.
▲ 류충렬씨가 이젠 허물어져 그 터에 폐가만이 남아 있는 옛 도문성당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도문본당의 역사는 아주 짧다. 1941년에 설정돼 7년만에 폐쇄됐기에 기록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초대 주임 벤츠(A. Benz) 신부는 1942년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했고, 연길 성 십자가 수녀회도 도문에 수도자 2명을 파견해 전교와 교육, 의료활동을 펼친다. 하지만 1946년 4월 부활시기 때 벤츠 신부가 중국 공산당에 체포 투옥됨으로써 어려움을 겪었고, 보좌로 사목하던 김봉식 신부가 2대 주임으로 활동했지만 1947년 8월 중국 공산당에 의해 본당 또한 폐쇄된다.
현재 도문 복음화 소명은 도문공소가 이어간다. 배석현(프란치스코, 82), 리순금(도로테아, 62)씨 등은 1979년 공동체를 재건, 1984년 국경로 72의 20에 65.7㎡(20평) 규모 경당을 지었고, 1996년 8월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연합회 후원으로 부지 4397㎡(1330평)에 건축면적 1056㎡(319평) 규모 현 도문성당을 준공한다.
하지만 이 성당은 방음ㆍ방한 설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아직 전례공간으로 쓰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전호승(베네딕토, 70) 회장을 중심으로 80여 명은 성모신심단체를 결성하는 등 열심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사진=전대식 기자 jfa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