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 5000km 대장정(6) - 대령동 차조구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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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 5000km 대장정(6) - 대령동 차조구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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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교구 설정 80돌 기획] 연길 5000km 대장정(6) - 대령동 차조구본당 

 

10개 공소 거느렸던 본당은 아스라이


 

   "나는 봇나무/한 그루의 깨끗한 봇나무/겨레의 족속으로 태여난/하아얀 아들이다."(김파 시인의 '나는 봇나무'에서)

 '덥석 껴안으면 한 방울 눈물로 흐를' 백두산으로 향하는 길엔 봇나무('자작나무'의 북녘 사투리)가 장관을 이룬다. 백두를 껴안은 안도(安圖, 안투)현엔 봇나무 숲만 5만4000여hr나 된다. 거친 북방 땅에서 인고를 겪은 백의민족의 삶을 표상이나 하듯 봇나무는 의연하다. 그래선지 흰 봇곁(봇나무 껍질)이 인상적인 봇나무는 연변에서 배달겨레의 상징으로 통한다.

   이번 호에선 안도현 첫 본당인 대령동(大嶺洞, 따링뚱)본당과 함께 대령동에서 이전한 차조구(茶條溝, 차텨꺼우)본당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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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령동,차조구본당 위치도


   #수난으로 점철하는 '대령동본당'

   1932년 6월 초, 용정(龍井, 룽징)에서 노두구(老頭溝, 로투꺼우)를 거쳐 차조구로 가는 길목.

 용정서 기차를 타고 와 노두구에서 말로 갈아탄 연길교구 부감목(오늘날 총대리) 랍(C. Rapp) 신부는 남만주철도를 지키던 일군 수비대를 지나치고 있었다. 당시 만주를 휩쓴 장티푸스로 대령동본당 주임 아쇼프(S. Aschoff) 신부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당으로 급히 달려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일군 수비대 보초가 갑자기 멈추라고 외치자 랍 신부는 잠깐 말을 세우고 명함을 건넸으나 보초병은 이를 땅에 홱 던져버리고 다짜고짜 말에서 끌어내려 구타했다. 한참을 구타한 일본 군인들이 "내가 잘못했다"고 쓴 쪽지를 내밀며 서명을 강요했다. 이에 랍 신부는 서명을 거부했으나, 일본군의 폭행이 이어졌고, 얼마 뒤 총살돼 강변에 유해가 버려진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연길교구와 봉천(현 선양, 瀋陽) 주재 독일대사관, 일군 간 긴장이 고조되던 중, 대령동본당 회장이던 조 마르티나가 일군에게 또 다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이유는 랍 신부가 흘린 피를 닦은 수건을 보관하던 조 회장이 랍 신부가 일군 수비대에 살해됐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정황은 슈레플(C. Schrafl, 주성도) 신부 자서전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분도출판사), 「연길문사자료」 제8집 등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사건은 일제측의 얼마되지 않는 위자료 지급으로 흐지부지됐지만, 당시 간도 복음화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서 전개됐는지, 그 실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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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 5월 뮐러 대령동본당 보좌 신부가, 그해 6월 아쇼프 주임 신부가 그해 만주를 휩쓴 장티푸스로 선종한다. 사진은 묘소 앞에서 짧은 기도를 바치는 성 베네딕도회 고진석(왼쪽부터) 신부와 송대석 수사, 안내자 박철진 베네딕토씨, 안도ㆍ돈화본당 주임 윤덕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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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리가 굽은 김금녀 데레사 할머니가 송대석 수사에게 성당 터를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대령동서 차조구로 본당을 이전하다

 이처럼 독립군과 일군, 중국군, 공산당, 마적이 뒤얽히는 위험한 상황에서 개척한 본당이 1926년 6월 말 팔도구(八道溝, 빠또꺼우)본당에서 분리된 대령동본당이다. 1910년 대령동(현 안도현 석문진 대성촌)에 팔도구본당 관할 공소로 설립된 지 16년 만에 본당으로 설정된 것.

 임시 주임 엠머링(P. Emmerling) 신부에 이어 연길에서 51㎞ 떨어진 이 위험한 사목지에 부임한 초대 주임은 일군에 의해 피살된 랍 신부로, 1928년 5월 부임해 3년간 성당과 사제관, 사무실을 신축했고 청년회, 소년회 등을 조직했으며 10개 공소를 사목했다. 2대 주임 아쇼프 신부와 초대 보좌 뮐러(E. Muller) 신부도 간도 가톨릭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대령동본당에서 전 연길교구 소년회연합총회를 개최했고, 성가대를 조직하는 등 3년간 본당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1932년 5월에 뮐러 신부가, 그해 6월에 아쇼프 신부가 전염병으로 선종한다. 이로써 연길교구는 그해에만 두 사제를 비롯해 랍 신부, 팔도구본당 보좌 엠머링(P. Emmerling) 신부 등 선교사 4명을 한꺼번에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어 1934년 콜러(S. Koller) 신부가 부임했으나 이듬해 3월 공산당의 방화로 성당과 부속 건물이 전소돼 인근 차조구(현 안도현 석문진 석문촌)로 본당을 이전한다. 새 성당을 차조구본당으로 개칭한 콜러 신부는 공산당과 마적의 습격, 본당 이전의 악조건 속에서도 교세 확대에 노력했으며 8개 공소를 사목하는 등 옛 모습을 회복하는 듯했다. 하지만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성당을 비롯한 교회재산을 몰수당해 '침묵의 교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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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조구본당 출신인 김남수 주교가 1996년에 세운 차조구공소 건축물. 지금은 30여 명의 신자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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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령동,차조구성당 그 옛 자취는 찾기 어렵고
 대령동성당 터를 찾기에 앞서 아쇼프 신부와 뮐러 보좌 신부의 묘소를 찾았다. 10여 분간 대성촌 마을 뒷산 언덕을 걸어 오르니 두 사제를 합장한 묘소가 묘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1993년 5월에 건립했다는 기록이 빗돌에 남아있는 것으로 미뤄 그 이전에 빗돌이 세워져있지 않았기에 묘지가 파헤쳐지지 않고 문화혁명을 피해갈 수 있지 않았나 싶었다.

 대성촌에는 현재 신자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우연히 만난 마을 주민 김혜숙(73)씨에게 물어 김원일(베드로, 79)ㆍ김금녀(데레사, 76)씨 부부의 집을 찾아갔다. 마을 뒷쪽 산자락에 살고 있는 노부부는 운신이 불편한 데도 자신의 집 옆에 지었다는 아들 김철수(야고보, 57)씨 집으로 안내하더니 아들 집 뒷쪽 텃밭이 옛 대령동성당 터라고 증언한다. 콜러 신부를 기억한다는 김 할머니는 "한때 80여 가구에 400명이 넘던 이 마을이 지금은 30여 가구에 50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쇠락해 불탄 성당터에 세워졌던 공소도 최근에 없어졌다"고 귀띔했다.

 대성촌에서 1㎞쯤 떨어진 석문촌에 이르렀다. 현지서 확인하니, 석문중심학교 정문 앞 오른쪽 창원상점과 조선족반점 자리에 있었다는 차조구성당 또한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김남수(안젤로, 1922~2002, 전 수원교구장) 주교 지원으로 1996년에 세웠다는 차조구공소만이 석문촌 골목 안에 남아 있다. 대성촌에서 머지 않은 태평골 인근 멍게골 출신인 김 주교는 생전 고향을 그리워하며 북방선교에도 힘을 기울였고, 수원교구는 지금도 그 정신을 잇고 있다. 이 공소는 1990년대 후반만해도 신자 수가 160여 명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30여 명밖에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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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대령동본당 공동체 미사 집전 장면. 1920년대 후반 막 본당으로 설정된 직후여서 초가 성당이 좁아 대축일이나 교중미사 때는 성당 마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곤 했다. 사진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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