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교회 복음화 길] 캄보디아 - ‘킬링필드’에서 돋아난 신앙의 새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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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교회 복음화 길] 캄보디아 - ‘킬링필드’에서 돋아난 신앙의 새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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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와 내전에 쓰러졌던 교회, 상처 치유하며 다시 일어서다

[특별기획-아시아 교회 복음화 길을 따라서] 캄보디아 - ‘킬링필드’에서 돋아난 신앙의 새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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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링필드 당시 순교한 사제와 수도자들의 사진. 캄보디아 교회는 킬링필드 당시 순교자들을 시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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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링필드 당시 순교한 사제와 수도자들의 사진. 캄보디아 교회는 킬링필드 당시 순교자들을 시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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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놈펜 프삿도잇의 성 요셉 성당에 위치한 기록화. 당시 정권을 잡은 크메르 루주는 사람들을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시켜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지식인 계층과 외국인들은 물론 자국민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캄보디아 프놈펜대목구에는 대목구장이 십자가를 물려받는 전통이 있다. 현 대목구장인 올리비에 슈밋하우슬러 주교가 목에 걸고 다니는 금빛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 십자가는 사실 프놈펜대목구의 첫 캄보디아인 주교였던 치막 살라스 주교의 것으로 알려진 성물이다. 살라스 주교는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희생양 중 한 명이다. 킬링필드는 1975부터 4년여 동안 캄보디아 공산당 무장조직인 ‘크메르 루주’가 자국민 약 200만 명을 집단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주교의 십자가가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그의 어머니 덕분이었다. 살라스 주교의 어머니가 그의 십자가를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정부 몰래 십자가를 감췄기 때문이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십자가는 1997년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킬링필드’로 단절됐던 캄보디아 교회의 역사가 다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장현민 기자 memo@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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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교회의 역사

현재 캄보디아 가톨릭교회의 신자는 2만 명 정도이다. 대목구 1곳과 지목구 2곳이 설정되어 있고, 신부 73명과 본당 62곳이 있다. 

캄보디아 교회의 역사는 4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55년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캄보디아에 들어와 선교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당시는 외국인 상인들을 위한 사목만이 허용됐을 뿐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는 금지돼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일본과 인도네시아, 베트남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캄보디아에 공동체를 구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샴(현재의 태국)과 안남(현재의 베트남) 등 주변국의 침략으로 무너진다. 이처럼 잦은 전쟁과 가톨릭에 적대적인 분위기, 정글 기후, 험준한 산악 지형 등은 선교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그래선지 캄보디아에 가톨릭이 소개된 지 400여 년이 지난 1957년에 이르러서야 첫 번째 현지인 신부가 탄생한다. 1960년대 후반에는 신자 수가 12만여 명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킬링필드와 교회의 붕괴

그러나 1970년, 크메르 루주의 부상과 함께 캄보디아 교회에 혹독한 시련이 닥친다. 당시 크메르 루주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농경 중심 사상에 집착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집단 농장을 만들어 도시민들을 강제 이주시켰고, 외국인과 지식인들은 외국의 첩자로 몰아 살해했다.

가톨릭 신자들 역시 크메르 루주가 수도 프놈펜을 점령한 1975년 이후 대부분이 처형되거나 강제 노동에 동원돼 고문과 기아, 질병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었다. 가톨릭이 서양 종교란 점도 탄압받은 한 이유였다. 캄보디아 현지인 신부와 수녀들은 물론 캄보디아에 남아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까지 모두 살해됐다. 성당들도 대부분 철거당했다. 지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땀꼭 지역 근처에 위치한 깜뽕꼬 교우촌의 경우 수백 명에 달했던 주민 전부가 살해당하거나 실종됐다. 불과 4년 사이에 캄보디아 교회의 기반은 완전히 붕괴했다.

크메르 루주 정권이 밀려난 이후에도 교회엔 시련이 계속됐다. 베트남의 비호를 받으며 등장한 캄보디아 공산 정부 역시 종교 자유를 억압하며 교회를 탄압했다. 여기에 내전이 오래 이어졌다. 캄보디아 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되찾은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이미 10만이 넘던 신자는 거의 전멸한 상태였다. 

프놈펜대목구장 올리비에 슈밋하우슬러 주교는 “1991년도 기록을 보면 프놈펜대목구의 경우에는 신자가 수백 명 수준이었고, 바탐방지목구는 단 20~30여 명의 신자만이 남아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며 “그 가운데 신부는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성지 ‘땀꼭’

‘킬링필드’는 캄보디아 교회가 수백 년 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빼앗았다. 사실상 지금의 캄보디아 교회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없이 산적한 과제 가운데 캄보디아 교회가 가장 우선하고 있는 것은 ‘킬링필드’의 광풍으로 목숨을 잃은 신앙인들을 기억하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매년 5월 20일 캄보디아 교회는 ‘땀꼭’ 지역에 모여 ‘킬링필드’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땀꼭 지역은 치막 살라스 주교가 순교한 곳으로 알려진 장소다. 살라스 주교는 1975년 4월 1일, 수도 프놈펜이 크메르 루주에게 점령되기 3일 전 주교품을 받았다. 크메르 루주의 서슬 퍼런 위협에 외국 선교사들마저도 캄보디아 밖으로 탈출하는 상황이었다. 크메르 루주의 정권 아래에서 그의 주교 서품은 죽음의 길을 택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캄보디아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주교품을 받았고 ‘땀꼭’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한 뒤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숨을 거뒀다. 캄보디아 교회에서는 살라스 주교를 포함한 모든 킬링필드의 희생양을 기억하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땀꼭 지역을 사들였다. 그리고 그 위에 희생자들을 위한 십자가를 세우고 매년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캄보디아 교회는 살라스 주교를 포함한 14명의 순교자 시복도 추진하고 있다. 슈밋하우슬러 주교는 “이들 14명 외에도 캄보디아 내에는 수많은 사제, 수도자,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대부분 시신은 물론 기록조차 찾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아직 순교자들을 공식적으로 추모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과거의 비극을 기억하고 교회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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