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 5000㎞ 대장정(8) 합마당본당, 왕청(백초구)본당, 왕청공소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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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4 15:13
[연길교구 설정 80돌 특별기획] 연길 5000㎞ 대장정(8) 합마당본당, 왕청(백초구)본당, 왕청공소
78년 세월 성당 폐허됐어도 신앙재건
왕청(汪淸, 왕칭)현으로 향했다. 연길에서 왕청현까지는 북쪽으로 87㎞. 또 거기서 북서쪽으로 37㎞를 더 가면 대흥구(大興溝, 따씽꺼우)진이 나온다. 그 대흥구진 북합마당(北蛤 벌레충+莫塘, 베이하마탕)에 성당이 세워져 있다. 지난 6월 23일 명월구(明月溝, 밍웨꺼우)성당이 재개발로 허물어짐에 따라 합마당성당은 연길교구가 남긴 유일한 교회건축물이 됐다. 이 성당과 함께 합마당본당에서 분가한 왕청본당, 그리고 현재 그 신앙의 맥을 잇는 왕청공소를 살핀다.
▲ 합마당,왕청(백초구)본당, 왕청공소 위치도 |
#연길교구가 남긴 유일한 교회건축 '합마당 성당'
"사람들이 제게 온종일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 빈정거리니 낮에도 밤에도 제 눈물이 저의 음식이 됩니다"(시편 42,4).
북합마당 홍일촌에 들어섰다. 주민 100여 가구 200여 명이 모두 한족으로, 조선족은커녕 신자 또한 한 사람도 없는 이 마을 한복판에 성당이 우뚝 솟아 있다.
차에서 내려 성당을 바라보니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1946년 5월 합마당본당 주임 쾨스틀러(B. Kostler) 신부가 두만강 인근 남평(南坪, 난핑)수용소에 끌려가면서 폐쇄된 합마당성당은 50여 년간 소 외양간으로, 기름 공장으로 쓰다가 지금은 방치돼 있기 때문이다.
성당 정문 쪽 종각은 허물어져 외양간이 됐고, 성당 우물은 메워져 있다. 성당 정문 처마와 회랑은 파괴돼 없어진 지 오래다. 성당 오른쪽 벽면은 심각한 균열에 지붕 또한 낡아 무너지기 직전이다. 성당 오른쪽 돌출부 출입구에 해시계가 걸려 있을 뿐이다. 강원도 출신 조선이주민들을 주축으로 세워진 교회공동체는 이렇게 무너졌다. 현재 성당 건물은 쇠락에 쇠락을 거듭하고 있다.
성당 문을 열지 못해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기름을 짜다 남은 둥근 깻묵더미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어둔 공간 어디쯤에 십자고상과 제대, 성화, 무릎틀이 있었을지 가늠해보려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런데 취재진과 함께 합마당성당을 찾은 리광필(연길본당 보좌, 왕청공소 담당) 신부가 손을 들어 성당 정문을 가리켰다. 올려다보니, 촛불 다섯 개가 나란히 그려진 문양이 눈에 띈다. 동행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고진석 수사신부에 따르면, 5대륙에서 선교한다는 의미로 그려진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연합회의 문장이라고 한다. 1931년 12월 13일 완공돼 축복식을 가진 성당에 그려진 문장이 78년 세월을 딛고 살아남은 셈이다. 합마당본당에서 꽃피운 신앙의 맥은 이제 1990년대 초 남합마당 신흥촌에 세워진 합마당공소(회장 김일범 막시모)가 잇고 있다.
리 신부는 "합마당성당은 성당 건물과 부지를 합쳐 500㎡ 규모인데, 땅을 사서 수건(修建)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라며 "우선 신흥촌에 있는 공소 신자 7명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재건하는데 힘을 모으고 있다"고 전했다.
▲ 종탑은 파괴되고, 성당 정문은 외양간이 되고, 건물 벽체는 심각한 균열이 생기고, 지붕은 삭을대로 삭은 현재의 합마당성당. 기름공장으로 쓸 때 남은 깻묵과 갖은 찌꺼기로 가득차 있다. |
▲ 합마당성당에 새겨진 촛불 5개 모양의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연합회 문장. |
▲ 1931년 신축 직후 평화로운 합마당성당 공동체. 성당 정문 회랑과 종탑이 그대로 살아있는 합마당성당 앞에서 신자들이 밭을 갈고 있다. 사진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
#왕청본당 도한 흔적도 남기지 못했지만
과거 왕청현 소재지였던 백초구(百草溝, 바이초우꺼우)진은 이제 상당히 쇠락해 있다. 현 왕청현 소재지인 왕청진에 비하면, 아주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왕청현에서 남서쪽으로 28㎞ 가량 떨어진 백초구진엔 그러나 옛 역사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일본 영사분관과 경찰분서가 2007년 9월 3일 왕청현 문물(文物)보호단위로 지정 보존돼 있고, 항일 독립지사들을 고문하고 교수형에 처했던 고목도 여전히 푸르다.
그 백초구에서 물어물어 옛 성당을 찾아갔다. 백초구에서 치과의사로 일하는 조선족 김성우(49)씨와 주민 리춘도(54)씨 안내로 찾아간 왕청성당은 민가 텃밭으로 변해있었다. 백초구진 백초구촌 7대(隊)다. 시멘트 담벼락 넘어 바라본 텃밭엔 성당 흔적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네댓 살 무렵, 아버지(리병화, 2001년 선종)를 따라 성당에 와 봤다는 리춘도씨는 "왕청성당은 1960년대 중반 문화혁명 때 파괴됐다"고 전했다.
그 백초구진에 합마당본당에서 분가한 준본당 왕청(백초구)본당이 세워진 것은 1934년으로,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만주국(1932~45)을 세워 혼란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연길교구 본당 설립은 꾸준히 이어졌고 왕청준본당이 설정된 데 이어 연길교구가 배출한 첫 한국인 사제인 김충무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설정됐다.(정확한 본당 설정년도는 알 수 없다)
그러다가 1943년 일제가 선교사를 추방하면서 사제가 부족하게 된 평양교구에 김 신부가 파견되고 신윤철 신부가 부임했으나 5년 뒤인 1948년께 신 신부가 체포되면서 왕청본당은 침묵의 교회가 됐다. 신 신부는 당시 인민재판에 회부돼 장살형을 당할 뻔 했으나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것으로 전해진다.
6살 때부터 왕청본당에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김명숙(데레사, 79) 할머니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팔도구(八道溝, 빠또꺼우)본당 출신으로, 지금은 대흥구진 전하촌에 살고 있는 김 할머니는 "일제 말기 왕청본당은 신자 수가 100여 명쯤 됐는데, 초가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1942년께 성당을 신축하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해방이 되면서 흐지부지됐고 성당마저 폐쇄됐다"고 전했다.
▲ 왕청본당 공동체의 신앙을 잇고 있는 왕청공소 신자들이 평일미사 직후 성당 청소와 함께 빨래를 하고 있다. |
그 신앙은 2006년 9월 왕청진 동진촌 경안골목 265호에 세워진 왕청공소가 잇고 있다. 공소에 들어서니 리광필 신부가 신자 여섯 명과 함께 막 미사를 봉헌한 직후였다. 성당 청소에 열심인 신자들을 보니 왕청공동체의 미래가 손에 잡혀질 듯 밝게 느껴진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사진=전대식 기자 jfa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