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 5000㎞ 대장정(9) 무단쟝, 자무쓰, 푸진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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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seas Martyrs Shrine

연길 5000㎞ 대장정(9) 무단쟝, 자무쓰, 푸진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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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세월 성당 폐허됐어도 신앙재건


 

 왕청(汪淸, 왕칭)현으로 향했다. 연길에서 왕청현까지는 북쪽으로 87㎞. 또 거기서 북서쪽으로 37㎞를 더 가면 대흥구(大興溝, 따씽꺼우)진이 나온다. 그 대흥구진 북합마당(北蛤  벌레충+莫塘, 베이하마탕)에 성당이 세워져 있다. 지난 6월 23일 명월구(明月溝, 밍웨꺼우)성당이 재개발로 허물어짐에 따라 합마당성당은 연길교구가 남긴 유일한 교회건축물이 됐다. 이 성당과 함께 합마당본당에서 분가한 왕청본당, 그리고 현재 그 신앙의 맥을 잇는 왕청공소를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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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마당,왕청(백초구)본당, 왕청공소 위치도




   #연길교구가 남긴 유일한 교회건축 '합마당 성당'

 "사람들이 제게 온종일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 빈정거리니 낮에도 밤에도 제 눈물이 저의 음식이 됩니다"(시편 42,4).

 북합마당 홍일촌에 들어섰다. 주민 100여 가구 200여 명이 모두 한족으로, 조선족은커녕 신자 또한 한 사람도 없는 이 마을 한복판에 성당이 우뚝 솟아 있다.

 차에서 내려 성당을 바라보니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1946년 5월 합마당본당 주임 쾨스틀러(B. Kostler) 신부가 두만강 인근 남평(南坪, 난핑)수용소에 끌려가면서 폐쇄된 합마당성당은 50여 년간 소 외양간으로, 기름 공장으로 쓰다가 지금은 방치돼 있기 때문이다.

 성당 정문 쪽 종각은 허물어져 외양간이 됐고, 성당 우물은 메워져 있다. 성당 정문 처마와 회랑은 파괴돼 없어진 지 오래다. 성당 오른쪽 벽면은 심각한 균열에 지붕 또한 낡아 무너지기 직전이다. 성당 오른쪽 돌출부 출입구에 해시계가 걸려 있을 뿐이다. 강원도 출신 조선이주민들을 주축으로 세워진 교회공동체는 이렇게 무너졌다. 현재 성당 건물은 쇠락에 쇠락을 거듭하고 있다.

 성당 문을 열지 못해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기름을 짜다 남은 둥근 깻묵더미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어둔 공간 어디쯤에 십자고상과 제대, 성화, 무릎틀이 있었을지 가늠해보려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런데 취재진과 함께 합마당성당을 찾은 리광필(연길본당 보좌, 왕청공소 담당) 신부가 손을 들어 성당 정문을 가리켰다. 올려다보니, 촛불 다섯 개가 나란히 그려진 문양이 눈에 띈다. 동행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고진석 수사신부에 따르면, 5대륙에서 선교한다는 의미로 그려진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연합회의 문장이라고 한다. 1931년 12월 13일 완공돼 축복식을 가진 성당에 그려진 문장이 78년 세월을 딛고 살아남은 셈이다. 합마당본당에서 꽃피운 신앙의 맥은 이제 1990년대 초 남합마당 신흥촌에 세워진 합마당공소(회장 김일범 막시모)가 잇고 있다.

 리 신부는 "합마당성당은 성당 건물과 부지를 합쳐 500㎡ 규모인데, 땅을 사서 수건(修建)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라며 "우선 신흥촌에 있는 공소 신자 7명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재건하는데 힘을 모으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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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탑은 파괴되고, 성당 정문은 외양간이 되고, 건물 벽체는 심각한 균열이 생기고, 지붕은 삭을대로 삭은 현재의 합마당성당. 기름공장으로 쓸 때 남은 깻묵과 갖은 찌꺼기로 가득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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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마당성당에 새겨진 촛불 5개 모양의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연합회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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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년 신축 직후 평화로운 합마당성당 공동체. 성당 정문 회랑과 종탑이 그대로 살아있는 합마당성당 앞에서 신자들이 밭을 갈고 있다. 사진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왕청본당 도한 흔적도 남기지 못했지만

   과거 왕청현 소재지였던 백초구(百草溝, 바이초우꺼우)진은 이제 상당히 쇠락해 있다. 현 왕청현 소재지인 왕청진에 비하면, 아주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왕청현에서 남서쪽으로 28㎞ 가량 떨어진 백초구진엔 그러나 옛 역사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일본 영사분관과 경찰분서가 2007년 9월 3일 왕청현 문물(文物)보호단위로 지정 보존돼 있고, 항일 독립지사들을 고문하고 교수형에 처했던 고목도 여전히 푸르다.

 그 백초구에서 물어물어 옛 성당을 찾아갔다. 백초구에서 치과의사로 일하는 조선족 김성우(49)씨와 주민 리춘도(54)씨 안내로 찾아간 왕청성당은 민가 텃밭으로 변해있었다. 백초구진 백초구촌 7대(隊)다. 시멘트 담벼락 넘어 바라본 텃밭엔 성당 흔적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네댓 살 무렵, 아버지(리병화, 2001년 선종)를 따라 성당에 와 봤다는 리춘도씨는 "왕청성당은 1960년대 중반 문화혁명 때 파괴됐다"고 전했다.

 그 백초구진에 합마당본당에서 분가한 준본당 왕청(백초구)본당이 세워진 것은 1934년으로,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만주국(1932~45)을 세워 혼란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연길교구 본당 설립은 꾸준히 이어졌고 왕청준본당이 설정된 데 이어 연길교구가 배출한 첫 한국인 사제인 김충무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설정됐다.(정확한 본당 설정년도는 알 수 없다)

 그러다가 1943년 일제가 선교사를 추방하면서 사제가 부족하게 된 평양교구에 김 신부가 파견되고 신윤철 신부가 부임했으나 5년 뒤인 1948년께 신 신부가 체포되면서 왕청본당은 침묵의 교회가 됐다. 신 신부는 당시 인민재판에 회부돼 장살형을 당할 뻔 했으나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것으로 전해진다.

 6살 때부터 왕청본당에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김명숙(데레사, 79) 할머니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팔도구(八道溝, 빠또꺼우)본당 출신으로, 지금은 대흥구진 전하촌에 살고 있는 김 할머니는 "일제 말기 왕청본당은 신자 수가 100여 명쯤 됐는데, 초가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1942년께 성당을 신축하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해방이 되면서 흐지부지됐고 성당마저 폐쇄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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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청본당 공동체의 신앙을 잇고 있는 왕청공소 신자들이 평일미사 직후 성당 청소와 함께 빨래를 하고 있다.


 그 신앙은 2006년 9월 왕청진 동진촌 경안골목 265호에 세워진 왕청공소가 잇고 있다. 공소에 들어서니 리광필 신부가 신자 여섯 명과 함께 막 미사를 봉헌한 직후였다. 성당 청소에 열심인 신자들을 보니 왕청공동체의 미래가 손에 잡혀질 듯 밝게 느껴진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사진=전대식 기자 jfaco@

 

 

[연길교구 설정 80돌 특별기획] 연길 5000㎞ 대장정(9) 무단쟝, 자무쓰, 푸진본당 

 

90년전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곳으로


 

조선인본당과 중국인본당이 각각 분리돼 있어
통고의 어머니 본당, 활력에 넘치던 조선공동체
푸진성당, 조만간 시립박물관 조성으로 사라져


   헤이룽장(黑龍江)성으로 가는 길은 멀다. 무단쟝(木丹江)에서 침대열차편으로 끝간 데 없이 펼쳐지는 평원 '베이따황(北大荒)'을 가로질렀다. 밤새 딱딱한 3층 침대칸 잉워(硬臥)에 누웠다 일어났다 하다보니 베이따황의 해돋이를 감동적으로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1920년대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누빈 선교지로 향하는 마음은 설레었다. 이번 호에선 의란(依蘭, 이란)선교지에 설립된 무단쟝 조선인ㆍ중국인 본당과 자무쓰(佳木斯)본당, 푸진(富錦)본당 등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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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단쟝ㆍ자무쓰ㆍ푸진본당 위치 지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한국 순교복자 79위 시복을 한 해 앞둔 1924년 홍콩대표부에서 발간한 「한국 가톨릭(Le Cathelicisme en COREE)」에 실린 한국천주교회 관할 지도에 의란선교지 본당 위치를 그려넣었다.



   #발해의 옛 터전 무단쟝 통고의 어머니본당,사도 바오로본당

   왕청(汪淸, 왕칭)현을 지나 라오숭링(老松嶺) 정상에 오르자 헤이룽장성 이정표가 나타났다. 발해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숨결이 살아 있는 닝안(寧安)시가 눈 앞이다. 겨레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고토를 그냥 지나치려니 아쉽다. 게다가 닝안은 1844년 2월 김대건 신부가 '경원개시(慶源開市)'를 통해 선교사 입국 통로를 개척하고자 경유한 현장이어서 더 마음이 무겁고 안타깝다.

 그런데 닝안을 지나쳐 무단쟝시에 들어서자 '조선족 집중상업무역구'가 나타나 위로를 준다. 헤이룽장성에서 우리말로 표기된 상점을 보며 지나치니 반갑기만 하다. 무단쟝시 인구 260여 만 명 가운데 조선이주민은 13만 명으로, 그 중 1만3000여 명이 조선민족거리에 몰려 산다. 그 서장안가 구조로 248호에 1998년 9월 봉헌한 무단쟝 성 김대건본당(주임 조창쥔 신부, 趙長軍)이 있다. 지금은 조선족 150여 명과 중국인이 함께하는 공동체지만, 1920년대를 전후한 시기엔 조선인 본당과 중국인 본당이 각각 분리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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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12월에 건립한 조선이주민 공동체 보금자리인 옛 무단쟝 통고의 어머니성당. 사진 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조선이주민 공동체였던 무단쟝 통고의 어머니본당은 현 무단쟝본당과 2㎞ 가량 떨어진 서안구 조선족거리2구 113호에 있었다. 팔도구(八道溝, 빠또꺼우) 출신인 조춘화(요셉, 59) 무단쟝본당 회장의 안내로 찾아간 옛 성당 터전은 층집(아파트)으로 뒤덮여있고, 그 사이 오토바이와 자전거 주차시설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 그 뒷쪽은 해성학교였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중국이 개혁ㆍ개방되면서 이명근(토마스) 전 무단쟝시 천주교 상무위원 등 해성학교 동문들이 시 인민정부 측에 군 방산(防産)시설로 쓰던 성당과 학교 건물 2500㎡(성당 600㎡)를 돌려줄 것을 탄원했지만, 시 당국은 1991년 성당과 부속건물을 헐어버리고 그 터에 층집을 지었다.

 원래 이 성당은 1935년 12월 세워져 1951년 연길대수도원 출신 최영호 수사신부가 연길로 되돌아가기까지 16년간 지역 선교 첨병이 됐다. 한때는 신자 수가 3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활력이 넘치기도 했지만 지금은 교세가 400여 명에 그치고 있다. 조선 공동체의 활력은 중국인들도 인정을 하는 터다.

 반면 중국인 공동체였던 무단쟝 사도 바오로성당은 현재 무단쟝시 동장안가 동일조로 이슬람교 사원 청진사(淸眞寺) 옆 동안시장 인근 7층짜리 주상복합건물 터(1800㎡)와 그 앞 도로에 있었다. 1938년에 신축된 734㎡ 규모 중국인성당은 1948년 9월에 폐쇄됐으며, 1960년대 중반 문화혁명 때까지 잔존하다 파괴돼 현재는 무단쟝본당에 통합돼 있다.

 중국인공동체(회장 두밍더, 都明德)는 그래서 서안구 임해로에 600㎡ 규모 성당을 신축 중이지만, 설계가 잘못돼 거의 다 지어놓고도 언제 성당을 봉헌할지 요원한 상태다.


   #성 베네딕도회가 개척한 자무쓰,푸진본당

 현 헤이룽장성 동부 의란선교지가 성 베네딕도회 관할에 놓여있던 시기는 1921년 이후 16년간이다. 1920년 8월 원산대목구 설정 이후 이듬해 3월 연길ㆍ의란선교지 관할권이 베이만츄(北滿州)대목구에서 원산대목구로 넘어오자 원산대목구장 사우어(B. Sauer) 주교는 기존 관할구역보다 3배나 큰 연길과 북만주 지역에 선교 역량을 집중한다. 1922년에는 푸진(富錦)시에 푸진본당을, 1927년 자무쓰(佳木斯)시에 자무쓰본당을 각각 설립한다. 푸진시에는 슈바인베르크(M. Schweinberg) 주임신부와 렌츠(P. Lenz) 보좌신부를 파견했고, 자무쓰시에는 렌츠 주임신부와 바이드너(R. Weidner) 보좌신부를 보냈다. 하지만 두 본당은 1935년 티롤의 카푸친회로 관할권이 넘어가 베네딕도회가 연길로 철수하며 원산대목구와 인연이 일찌감치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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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자무쓰성당. 오른쪽 뒷편 400m 지점에 옛 자무쓰성당 터가 층집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도 교회사의 옛 터전을 살피고자 열차편으로 무단쟝에서 자무쓰를 향해 떠났다. 밤새 7시간 40분을 달려 새벽녘에 도착한 자무쓰시는 인구 48만 명 규모의 중소도시였다. 역전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무작정 천주교당으로 향했다. 무단쟝본당 전례담당 봉사자 손호(요셉, 44)씨와 함께 찾아간 현 자무쓰성당(주임 장쪼우후 신부, 張照富)은 자무쓰시 영안가 남단에 있다.

 1998년 시로부터 520㎡ 규모 부지를 제공받아 지었다는 성당은 산뜻해 보였다. 옛 성당은 현 성당 뒷쪽 400m 아동식품공장 터에 있는데, 새 성당을 지을 때까지는 성당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동식품공장 건물 곁에 층집들이 세워져 옛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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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진시립박물관이 들어설 푸진성당 터전. 성당 곁에서 한 인부가 벽돌건물을 해머로 부수고 있고, 멀리 바라다보이는 푸진성당은 허물어지기 직전이다.


 다시 자무쓰역으로 돌아가 버스를 타고 5시간 넘게 평원을 달려 푸진시에 도착했다.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시와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최북단 도시 푸진시에는 현재 신자 10여 명만이 명맥을 잇고 있다. 다행히도 2400㎡ 규모 성당 건물이 푸진시 남2도가 서쪽 제3중학교 서쪽에 남아 있다. 그렇지만 1938년 1월에 세웠다는 성당은 1940년대 말 폐쇄돼 시 공산당사로 쓰다가 화학공장으로 쓰였다. 성당 종탑은 반쯤 파괴됐고 그 곁에 공장용 굴뚝이 세워져있다. 기와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고, 성당 창문도 벽돌로 꼭꼭 메워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카푸친회 수도자들이 살던 성당 옆 숙소는 이미 철거됐고, 옛 우물도 메워진 채 방치돼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전해준다.

 올해 여든여덟 살의 류신무(劉彦武, 요셉) 전 푸진본당 총회장은 "푸진본당은 한동안 민가를 성당으로 쓰다가 1930년대 말 카푸친회가 상하이(上海)에서 성당 건립기금을 모금해 새 성당을 지었는데 중국 최북단성당이어서 자부심이 높았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조만간 푸진시립박물관으로 조성될 성당과 그 터를 바라보자니 취재진이 푸진성당을 찾은 마지막 방문객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사진=전대식 기자 jf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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