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교구 설정 80돌 특별기획] 연길 5000㎞ 대장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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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seas Martyrs Shrine

[연길교구 설정 80돌 특별기획] 연길 5000㎞ 대장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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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영광 재현 향한 새로운 복음화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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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의 로마'로 불리는 팔도구 주민들의 신앙적 자부심은 대단히 강하다. 마침 성당에서 평일미사를 마치고 골목을 내려오는 할머니들을 만나 그 푸근하고 환한 표정을 포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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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변대 과학기술대에서 바라본 연길시 전경. 몇년 전만해도 낮은 평집이 대부분이던 연길시는 이제 스카이라인을 형성할 정도로 층집(고층건물)이 많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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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ㆍ중ㆍ러 국경지역인 육도포 마을에서 만난 한 조선족 칠순 노인의 손 마디마디는 척박한 땅에서 평생 땅을 일구고 살아온 고단한 삶을 압축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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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룡시 명성공소에서 함께한 연길교구 방문단. 왼쪽부터 안내를 맡은 박철진씨, 성 베네딕도회 고진석 수사 신부와 송대석 수사, 최천일 명성공소 회장, 조광택 화룡본당 주임 신부, 오세택ㆍ전대식 본지 기자.


  잊힌 교회 '연길교구'를 찾아 떠난 15일간 5000㎞ 여정은 꿈결인 듯 아련하고 쌉싸래하다.
 성당은 흔적조차 사라져 잡초 무성한 묵정밭이 되고, 사제관과 여타 교회부속건물도 폐허가 돼 버렸다. '교육 터전' 해성학교는 국공립소학교로 탈바꿈해 옛 정취를 잃었다. 공동체 또한 겨우 명맥을 잇거나 와해됐다.
 오는 7월 19일로 교구 설정 80주년을 맞는 연길교구는 합마당성당과 안도성당 등 교회건축물 2개 만을 남긴 채 영락해 있다.
 하지만 1979년 중국의 개혁ㆍ개방 이후 서른 해를 맞는 연길교회는 이제 '새로운 복음화'를 꿈꾼다. 조선족 사제 5명과 본당 공동체 6개가 힘을 합쳐 재복음화를 향한 여정에 들어섰다. 그 현장에서 옛 교회의 영광과 현 지역교회 실태, 앞으로 전망을 10여 차례 전한다.(본당 이름 표기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이기에 한글 표기를 원칙으로 하고 괄호 안에 한자와 중국식 발음 표기를 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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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길교구 본당 현황표


   #옛 교회 영화는 새벽 이슬처럼 스러지고
 
  관할구역 면적 5만8000㎢에 인구 80만 명, 신자 수 1만2257명(복음화율 1.53%), 예비신자 582명, 성직자 15명, 본당 8곳, 공소 147곳, 영세자 1065명, 회장 196명….
 교구 분할 직후 1928~29년 연길교구 교세 현황은 놀랍다. 당시 연길지목구를 분가시킨 원산대목구가 관할구역 53만3000㎢에 인구가 220만명으로 3배 가까이나 되고, 성직자 수는 16명, 본당 수는 6곳으로 비슷했는데도 신자 수가 4분의 1인 2922명(복음화율 0.13%)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연길교회의 활력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이 같은 신앙적 활력을 밑바탕으로 연길지목구는 1945년 해방 전후까지 총 23개 본당을 설립, 복음의 꽃을 피웠다. 관할구역만해도 당시 간도성(현 지린성 동부) 화룡ㆍ혼춘ㆍ연길ㆍ왕청현과 길림(吉林, 지린)성 돈화ㆍ액목현, 빈강성(현 헤이룽장성 동부) 녕안ㆍ동영ㆍ목단강현 등 9개 현에 달했다.
 일본이 청과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 즉 현 연변조선족자치주 영유권을 청에 강제로 넘겨준 것이 1909년 9월이니 국제법상 중국 땅이었지만, 연길교구는 한국천주교회 관할에 놓여 있었다. 1896년부터 1921년까지는 원산본당에, 1921년부터 1928년까지는 원산대목구(훗날 함흥교구 및 덕원자치수도원구)에 속해 있었고, 1928년 7월 19일 연길지목구 설정 이후에도 한국교회와 긴밀히 협력했다. 중국인도 사목했지만, 조선인 공동체 사목이 위주였기 때문이다.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연합회 산하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이 선교를 맡은 연길교구는 당시 오딜리아연합회에서 두 번째로 큰 선교지역이었으며, 해방 직전인 1944년에 19개 본당에 신자 수가 1만8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946년 4월 중국에 교계제도가 설정되면서 심양(瀋陽, 선양) 관구에 속하게 됨으로써 한국교회 관할에서 제외된다.

   #'중국 땅 조선교회' 연길교구, 그 영광과 시련

 연길교회의 시작은 한 평신도의 신앙적 결단에서 비롯됐다. 훗날 '간도의 사도'로 불리는 김영렬(세례자 요한, ?~1931)로, 그와 최규여(그레고리오) 등 '간도 12사도'는 간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다. 그 열매가 1898년 간도 부처골(佛洞, 현 용정시 지신진 신화촌)에 세운 첫 공동체 대교동공소 설립으로 나타나며, 이어 싸리밭골, 삼원봉(영암촌), 서학골, 용정촌, 조양하(현 팔도구) 등지에도 잇따라 공소가 세워진다.
 이처럼 신자가 늘어나자 북만주대목구장 랄루이에 주교도 간도지역 재치권을 조선교회에 넘긴다. 이에 당시 서울대목구장 뮈텔 대주교도 1907년 브레 신부를 간도에 파견, 조선인 사목을 시작한다. 이어 1909년 삼원봉(영암촌, 후일 대랍자)본당과 용정(훗날 용정하시)본당이, 1910년 조양하(팔도구)본당이 설립돼 교회가 그 꼴을 갖춘다.
 1920년 원산대목구의 설정은 간도 선교에 분기점이다. 함경남북도 선교를 맡은 원산대목구는 간도와 의란(현 헤이룽장성 동부) 선교지를 함께 관할하며 연길(훗날 연길하시)ㆍ팔지(훗날 육도포)ㆍ혼춘ㆍ부금(의란지목구)ㆍ대령동(훗날 다조구)ㆍ돈화ㆍ가목사(의란지목구) 본당 등을 설립한다. 연길지목구 설정 이후엔 본당 증설이 확대돼 두도구ㆍ옹성랍자(훗날 명월구, 안도)ㆍ합마당ㆍ왕청(백초구)ㆍ목단강(조선인)ㆍ신참ㆍ목단강(중국인)ㆍ삼도구ㆍ도문본당 등이 설립된다.
 연길지목구는 그러나 마적들의 약탈과 전염병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목숨을 잃는 시련을 겪어야 했고, 1931년 만주국 건국 이후엔 일본군의 횡포도 잇따르는 가운데 1937년 4월 13일 대목구로 승격한다. 또 해방 이후엔 1945년 8월 소련군의 침략으로 희생자를 내면서도 이듬해 4월 11일 교구로 승격되는 기쁨을 맛봤지만, 곧바로 중국인민해방군이 진주하면서 박해를 받고 1949년, 1951년 두 차례에 걸쳐 선교사들이 추방돼 '침묵의 교회'가 된다. 이후 교구장 서리로 2대 악커만 신부(1950~54년), 3대 비테를리 몬시뇰(1954~80년)이 임명됐지만, 현재 중국교회 길림(吉林, 지린)교구에 병합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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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길교구 관할 구역


   #격동의 세월, 연길지목구는 어떻게 사목했나

 당시 연길지목구를 맡았던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조선 출신 수도자 양성과 함께 벽돌ㆍ열쇠ㆍ목공ㆍ재봉ㆍ금속ㆍ인쇄ㆍ정원ㆍ요리ㆍ건축ㆍ자동차 관리 및 운전 등 각 분야에서 다양한 봉사를 하며 사도직을 수행했다. 인쇄소는 특히 당시 연길수도원의 가장 큰 사업체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 지원이 끊겼을 때 수도원의 수익 대부분은 인쇄소에서 나왔다.
 연길지목구의 전례운동은 특기할 만하다. 당시 연길지목구장 브레허 주교는 신자들의 능동적 미사 참례를 위해 미사경본의 한국어 번역을 추진하는 한편 벨기에 전례운동을 받아들여 '미사 경본과 성무일도의 자국어화'를 강조했다. 이는 1966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야 전 세계 교회에서 이뤄지는 전례 토착화가 이미 1930년대에 이뤄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 결과 1932년 등사판 조선어 「미사경본」과 「소미사 경본」이 나왔고, 브레허 주교는 이같은 전례개혁에 발맞춰 곧바로 '신자들을 향한 미사'를 집전한다.
 공산주의의 사상적 영향이 컸던 상황을 감안, 연길지목구는 1931년 가톨릭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복사 단체 '타르치시오회' 조직을 시작으로 가톨릭소년회 연합대회를 소집, 본당 청소년모임 연합회도 결성했고 「가톨릭 소년」지를 발간하기도 한다. 또 선교 수단으로 교육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각 본당에 해성학교, 또는 해성학원을 설립했으며 1938년에는 교구 내에 9개 학교가 운영됐다.
 이처럼 연길교구는 각 분야별 봉사와 교육 사도직, 전례 개혁을 통해 한국천주교회에 선구적 발자취를 남겼다.

   #지금 연길교회는, 또 앞으로 전망은

 현재 길림교구에 속해 있는 연길교회는 조선족 사제 5명이 사목을 전담하고 있다. 관할 구역은 연변조선족자치주 4만2700㎢로, 연길(延吉, 옌지)ㆍ도문(圖們, 투먼)ㆍ돈화(敦化, 둔화)ㆍ용정(龍井, 룽징)ㆍ혼춘(琿春, 훈춘) 등 5개 시와 안도(安圖, 안투)ㆍ화룡(和龍, 허룽)ㆍ왕청(汪淸, 왕칭) 등 3개 현이다. 중국 내 조선족은 2006년 현재 192만8000여 명에 이르지만, 연변자치주 내 조선족은 자치주 내 전체 인구 200만 명 중 70만 명에 그친다. 조선족 신자 수는 700여 명(중국인 신자까지 합치면 3000여 명)으로, 복음화율은 0.1%이며 중국인을 포함해야 0.15%다.
 현재 연길교회는 본당이 혼춘ㆍ연길ㆍ안도ㆍ돈화ㆍ화룡ㆍ용정본당 등 6곳이다. 혼춘본당은 조선족 사제단의 맏형 엄태준 신부가, 연길본당은 염창원 신부가 맡고 있고, 안도ㆍ돈화본당은 윤덕헌 신부가, 화룡ㆍ용정본당은 조광택 신부가 각각 겸직하고 있다. 왕청공소와 합마당공소는 연길본당 보좌인 이광필 신부가 맡아 사목을 하고 있다.
 문제는 조선족 인구 수의 계속되는 감소로 자치주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자치주 소수민족 인구비율 요건인 33%를 채우지 못하는 시ㆍ현이 늘어 자치주 정부는 지난 3월 17일 조선족 인구 비율이 50~60%인 연길과 용정, 도문시 등 3개 시를 통합하기 위한 '중국 공산당 연ㆍ룡ㆍ도 위원회'를 구성, 연ㆍ룡ㆍ도 자치시로 존속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는 연변 내 조선족이 한국, 혹은 중국 내 대도시로 떠나 이 지역 조선족은 노인과 어린이만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선족 사제들은 복음화를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염창원 신부는 "해방 이후 천주교회 공동체는 뿌리째 흔들렸기에 개혁ㆍ개방 30년을 맞는 지금도 연길교회는 새로 시작하는 교회다"며 "사목을 하며 가끔 '연옥이 이보다 더 힘들까'싶기도 하지만, 전 신자 공동체에 대한 재교육과 영성 심화, 조선족 사제 및 수도 성소 발굴을 통해 새 복음화를 이뤄 내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사진=전대식 기자 jf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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