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4. 다산 정약용과 「칠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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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0:07
다산, 배교 선언 이후에도 「칠극」의 가르침 계속 되새겨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 다산 정약용과 「칠극」
2020.05.31발행 [1566호]
▲ 「다산선생서첩」에 쓴 다산의 친필. 제자에게 주는 훈계의 말을 담았다. (조남학 소장) |
▨ 「칠극」을 평생 아껴 읽은 다산
다산 정약용(요한 사도)의 자형 이승훈(베드로)이 동지사 부사로 간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1784년 봄에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그의 수중에 방적아(龐迪我)의 「칠극(七克)」, 필방제(畢方濟)의 「영언여작(靈言勺)」, 탕약망(湯若望)의 「주제군징(主制群徵)」 등의 책이 들려있었다. 다산은 이를 큰 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요한 세례자)을 통해 구해 읽고 급격한 마음의 쏠림을 느꼈다.
여러 책 중 다산의 마음을 끈 것은 단연 「칠극」이었다. 「칠극」은 다산의 생애 전반을 함께한 책이었다. 강진 유배 이후에도 「칠극」의 그림자는 다산의 글 곳곳에서 얼비친다. 다산은 제자들에게 증언(贈言) 형식의 훈계어를 참 많이 남겼다. 다산의 제자 치고 스승에게 친필로 쓴 증언첩을 받지 못한 사람이 드물었을 정도였다. 이런 증언첩은 필자가 직접 찾아다니며 실물로 본 것만도 몇십 개가 넘는다.
증언첩에 실린 글은 잠언풍의 토막글이다. 이른바 어록체로 불리는 전통적 글쓰기와 외형상 비슷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예를 들어 제자 윤종문에게 준 증언첩의 한 단락은 이렇다. “맹자는 대체(大體)를 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되고, 소체(小體)를 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되어 금수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했다.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데만 뜻을 두어 편안히 즐기다가 세상을 마쳐, 몸뚱이가 식기도 전에 이름이 먼저 사라지는 것은 짐승일 뿐이다. 짐승으로 사는 것을 원한단 말인가?”
해남 사람 천경문에게 준 증언첩에서는 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애를 쓰면서 입과 몸뚱이의 욕망만을 섬긴다. 가래 끓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서, 눈빛이 천장만 쳐다보게 될 때 돌이켜 평생 한 가지 말할 만한 사업조차 없고, 죽은 뒤에는 온갖 처량하고 괴로운 일들뿐임을 생각하다가, 몸이 차게 식기도 전에 이름이 이미 스러져 버리는 자는 대체 어떠한 사람이란 말인가?”
확실히 이런 글쓰기는 이전 유학자들의 훈계와는 자못 결이 달랐다. 오랫동안 이 필첩들을 되풀이해 읽다가 어느 날 문득 이 독특한 글쓰기의 연원이 바로 「칠극」이었음을 깨닫고 놀랐다. 그 같은 사실을 결정적으로 확인시켜 준 글이 바로 다산의 「취몽재기(醉夢齋記)」였다.
▨ 「칠극」의 논의를 풀어쓴 「취몽재기」
강진에 귀양 가서 5년쯤 지난 1805년 무렵, 다산은 강진 사람 황인태(黃仁泰)와 가깝게 지냈다. 그는 시도 잘 짓고, 글씨에도 능해 주막집 골방을 가끔 들러 다산의 말벗이 되어준 사람이다. 어느 날 그가 다산을 찾아와 당호를 ‘취몽재’로 지었다면서 글을 청했다. 다산은 그를 위해 「취몽재기(醉夢齋記)」를 써주었다.
글의 앞 대목을 간추리면 이렇다. “취한 사람에게 취했다고 하면 원통해 하며 자기는 취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높은 벼슬에 오르거나 귀한 보물을 얻는 꿈을 꾸는 사람은 깨기 전에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른다. 정말 병이 위독한 사람은 자기가 병든 줄을 알지 못한다. 자기가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짜 미친 것이 아니다. 정말 간사함이나 음탕함, 게으름에 빠진 사람은 그것이 나쁜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이 나쁘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잘못을 고칠 수 있다. 그러니 스스로 취했다고 하고, 꿈꾼다고 하는 사람은 술과 잠에서 깨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칠극」 권 1 「복오(伏傲)」의 1절 첫머리에 보니, “꿈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미 꿈에서 깬 것이다. 그것이 악임을 인지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선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상태이다. 병을 처음 치료할 때는 모름지기 병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병을 병으로 인지하지 못해 치료하지 못하면 낫기가 어려워진다”는 말이 나왔다.
또 권 3 「해탐(解貪)」에는 “배불리 먹는 꿈을 꾸는 사람은 그 꿈을 꾸고 있을 때는 능히 그것이 진짜 배부른 것이 아닌 줄을 깨닫게 할 수가 없다. 재물을 좋아하는 자 또한 능히 지금 얻은 재물이 결국 헛된 물건인 줄을 알도록 깨닫게 할 수가 없다. 죽을 때가 이르거나 꿈을 깨고서야 깨닫는다. 애석하구나, 그때는 너무 늦었다”라고 했다.
다산은 「취몽재기」 끝에다 “나는 취하고 꿈꾸는 것에 대해 들은 주장이 있으므로, 마침내 써서 준다(余於醉夢也有說, 遂書以贈之)”고 했는데, 그가 들은 주장이 바로 「칠극」에 나오는 위 두 도막의 글이었다. 배교 선언 이후 강진 유배 기간 중에도 다산은 이렇듯 「칠극」의 가르침을 계속 되새기고 있었다.
▨ 메기와 미꾸라지
다산은 「두 아들에게 써준 가계(示二子家誡)」에서 “재화를 비밀스럽게 감춰두는 것은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만 함이 없다. 단단히 잡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미끄럽게 빠져나가니 재화란 것은 메기와 같은 것이다(凡藏貨密, 莫如施舍. 握之彌固, 脫之彌滑, 貨也者鮎魚也)”라고 했다. 「칠극」 권 1에도 “너무 쉽게 흘러가 옮기는 것으로는 귀한 지위 같은 것이 없다. 굳게 붙잡으려 해도 진흙탕의 미꾸라지를 잡는 것과 같아 단단히 잡으면 잡을수록 빨리 놓치고 만다(至易遷流, 莫如貴位. 欲固得之, 如握泥鰍, 握愈固, 失之愈速)”고 했다.
제자 윤종심(尹鍾心)에게 준 증언(贈言)도 「칠극」의 느낌이 짙다. 곡산 부사 시절에 다산은 고을의 토지 문서를 살펴보았다. 100년 사이에 보통 대여섯 번 주인이 바뀌고, 심한 경우 아홉 번까지 바뀌었다. 다산이 말했다. “창기(娼妓)는 남자를 자주 바꾼다. 어찌 내게만 유독 오래 수절하기를 바라겠는가? 토지를 믿는 것은 창기의 정절을 믿는 것과 같다.” 부자는 넓은 밭두렁을 보며 자손을 향해 자랑스레 외친다. ‘만세의 터전을 너희에게 주겠다.’ 하지만 그가 눈을 감기도 전에 그 자식은 여색과 노름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만다.
「칠극(七克)」 2장 「해탐(解貪)」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탐욕스레 재물을 모으는 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그토록 애를 씁니까?” “제 자식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의 아들은요?” “자기의 자식을 위하겠죠.” “이렇게 해서 끝없이 되풀이해도 결국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은 없군요.” 이어서 말한다. “세상의 재물은 나의 재물이 아니다. 다만 내 손을 거쳐 가는 것일 뿐이다. 앞서 이미 많은 사람을 거쳐서 이제 내게 온 것이다.(世財非我財, 惟經我手. 先曾已經多人, 乃今及我.)” 세간의 재물은 잠시 맡아 보관하는 것일 뿐, 천 년 만 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식을 위해서는 안 하는 짓이 없고, 못 할 일이 없다.
또 권 5 「색도(塞)」의 한 단락이다. “대저 즐거움은 또한 괴로움의 씨앗이고, 괴로움 또한 즐거움의 씨앗이다. 지금 괴로움을 심지 않는다면, 나중에 어찌 즐거움을 거둘 수가 있겠는가?(夫樂亦苦種, 苦亦樂種. 今不以苦栽, 後安能以樂收?)”
다산은 이를 “즐거움은 비방의 빌미가 되고, 괴로움은 기림의 근원이 된다. 기림이란 나를 괴롭게 함을 통해 생겨나고, 헐뜯음은 나를 즐겁게 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다(樂者毀之䤂, 苦者譽之根. 譽由苦我生, 毀由樂我生)”라고 부연했다.
글을 읽다가 문득 기시감(旣視感)이 있어 보면 번번이 「칠극」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구문을 바꾸고, 메기를 미꾸라지로 교체했어도 뜻의 뿌리는 거기서 나왔다. 짧은 지면이라 다 소개할 순 없지만, 다산뿐 아니라 천주교를 믿지 않았던 연암 박지원의 글에도 「칠극」의 체취가 느껴지는 대목이 여럿 보인다. 「칠극」은 이렇듯 18, 19세기 조선에서 신앙 여부를 떠나 생각 이상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