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41. 별라산의 별난 사람 홍지영·강완숙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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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41. 별라산의 별난 사람 홍지영·강완숙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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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완숙 남편 홍지영은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의 7촌 서조카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1. 별라산의 별난 사람 홍지영·강완숙 내외

2021.03.07발행 [16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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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2년 덕산군 지도에서 별라산 인근을 화대한 지도.



홍지영의 별라산과 원백돌의 응정리

박종악이 정조에게 보낸 비밀 공문을 모은 「수기」는 1790년 진산 사건 이후 충청도 초기 교회의 생생한 현장 정보를 중계한다. 탄압 대상의 동향과 활동 정보 및 관련자 색출에 대한 보고서라서 그렇다. 「수기」에서 특별히 지속적 주목 대상이 된 인물 중 하나가 덕산 별라산(別羅山)의 홍지영이다.

1791년 12월 2일에 정조에게 보낸 비밀 공문에서 박종악은 이 지역의 호법(護法)하는 무리로 덕산 별라산(別羅山)의 홍지영(洪芝英)과 홍주 응정리(鷹井里)의 원백돌(元白乭)을 꼽았다. 별라산은 고지도에는 별아산(別鵝山)으로 나온다. 한편 박종악은 1792년 1월 3일의 보고에서 성호 이익의 종손 이삼환이 80여 호나 되는 장천리(長川里)에 사는데, 홍지영의 별라산과는 고작 3리 거리지만, 별라산과 달리 한 집도 사학에 물들지 않았다고 썼다. 홍지영이 살던 별라산이 이삼환의 장천리와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는 얘기다. 남아있는 1801년 이삼환의 호구단자에 따르면 장천리는 오늘날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이다.

홍지영의 집은 이곳에서 3리 떨어진, 별라산 자락 덕산군 고현내면(古縣內面) 별라산리(別羅山里)에 있었다. 오늘날 행정명으로는 예산군 고덕면 대천3리 별암 마을에 해당한다. 현지에서는 별아미 마을이라고도 한다. 별아산의 끝자락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로 보인다. 이곳은 1760년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편성 민호 93호, 남자 105명, 여자 260명이 거주한다고 쓴, 꽤 큰 규모의 마을이었다. (*별라산의 위치 비정과 관련 내용은 2015년 6, 7월에 임성빈, 최휘철 선생 등 천주교 순교자유적답사회에서 정리한 답사 보고서의 도움을 받았다. 귀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임성빈 선생께 감사드린다.)

원백돌은 복자 원시장 베드로이다. 백돌은 세례명 베드로의 음차다. 그가 있던 응정리는 홍지영의 별라산에서 9.8㎞ 떨어진 홍주 합남면(合南面)에 속한 지역으로, 오늘날 당진시 합덕읍 성동리이니 현재 합덕 성당이 자리한 일대이다. 인근에 신리, 솔뫼성지가 도보 거리에 포진해있다. 여사울성지와도 그다지 멀지 않다.

박종악은 홍지영에 대해 “원래 양반의 명색으로 함께 배우는 사람은 상천(常賤)과 친소를 묻지 않고 번번이 내외가 상통하여 안방으로 맞아들인다”고 썼다. 홍지영의 아내는 바로 초기 교회의 여걸 강완숙(姜完淑, 골룸바, 1760~1801)이다. 열흘 뒤에 쓴 12월 11일 보고에서는 홍주 지역 사학교도들이 무려 60여 책의 사서(邪書)를 들고 와서 자수했고, 이에 홍지영 등 네 사람을 잡아 가두고 신당(神堂)을 헐어버리게 했다고 적었다. 이들은 당시 별도의 예배 공간까지 마련해두고 집회를 가졌던 모양으로, 천당(天堂)으로도 불린 예배 장소는 응정리 원백돌의 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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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8년 풍산홍씨 족보.(최휘철 선생 편집본에 필자가 관련 내용을 추가(초록색 부분)해 정리한 것임)



별라산의 신앙 공동체

12월 20일에 올린 보고에서 박종악은 다시 이렇게 썼다. 홍지영을 붙잡아 조사하자, “저의 어미와 처는 과연 서양학 언문 책자에 종사하였으나 저는 문자를 알지 못해 애당초 뜻을 두지 않았다”고 발뺌했고, 박종악은 홍지영을 타이른 뒤 다짐을 받고 석방했다. 한편 박종악은 홍지영이 “전혀 문자를 몰라 어리석기 그지없다”고 따로 보고 했다.

1792년 1월 3일의 보고에도 홍지영 집안의 신앙 활동에 대한 설명이 길다. 요약하면 이렇다. 이들은 상하친소(上下親疏)나 노소장유(老少長幼)를 따지지 않고 서로를 교중(交中)이라 부르며 신앙생활을 했다. 길가는 사람이 신자임을 밝히면 양반가의 아낙이 안방에서 그를 맞아 가까운 친척처럼 대접하고, 떠날 때는 노자까지 주어 보냈다. 양반가의 아낙은 언문 사서를 읽고, 상천(常賤)의 경우 입으로 외워 전했다.

이렇듯 별라산의 신앙 공동체는 1792년 당시 기록만 보더라도 신앙으로 똘똘 뭉친 특별한 구역이었다. 글 속의 양반가 아낙은 상경 이전의 강완숙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이밖에 홍지영 집 행랑채에 사는 고오봉(高五峯), 김취재(金就才)와 그의 다리 저는 처남, 대천(大川) 장터 옆 안갑동(安甲同), 이름을 모르는 안충의(安忠義) 외에 별라산 사람 장성로(張聖魯)와 그의 생질 이가(李哥) 등 여러 사람이 별라산 신앙 공동체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활발하게 신앙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특별히 장성로는 그 인근의 유명한 의사여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해 관가에서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홍지영은 혜경궁 홍씨의 7촌 서조카


앞서 12월 20일의 보고 끝에 추가된 다음 내용이 묘하다. “홍지영을 잡고 나서 비로소 이 사람이 영돈녕 홍낙성(洪樂性, 1718~1798)의 5촌 서조카임을 알았습니다. 그의 이름의 영(英)자는 영(榮)입니다. 당초에 사실과 어긋났으니 너무도 황공합니다.”

이름 한 글자 틀린 것이 왜 황공했을까? 돌림자가 영(英)이 아니라 영(榮)임이 밝혀지는 순간, 그는 임금 정조와 혼척으로 얽힌 가까운 집안이 되기 때문이다. 박종악이 무식한 향반으로 여겼던 홍지영은 놀랍게도 정1품 영돈녕부사 홍낙성의 5촌 서조카였다. 그는 좌의정과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로,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와는 6촌 간이었다. 그렇다면 홍지영은 임금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7촌 서조카이고, 강완숙은 혜경궁의 7촌 서질부(庶姪婦)가 된다. 그의 문벌이 비록 서족이라고는 해도 시골 구석의 한미한 무지렁이 양반은 아니었다.

이에 「풍산홍씨대동보」의 추만공파(秋巒公派) 파보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홍낙성의 부친 홍상한(洪象漢, 1701~1769)에게 서제(庶弟) 홍직호(洪直浩, 1719~?, 초명 鐵漢)가 있었고, 그의 아들은 홍낙풍(洪樂豊, 1743~1819)이었다. 조부 홍석보(洪錫輔, 1672~1729)는 서자 낙풍을 포함해 아들이 둘뿐이었다. 결국 홍낙성의 5촌 서조카라면 홍낙풍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족보에는 홍낙풍 아래에 ‘무후(無後)’라 하고 홍지영의 이름이 없다. 이름을 파낸 것이다. 왜 팠을까? 부부가 모두 천주교 신자였고, 대역부도로 죽은 강완숙의 이름을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족보에서 파낸 홍지영이 실제 홍낙풍의 아들이요, 홍직호의 손자란 사실은 어떻게 특정할 수 있을까? 1801년 「사학징의」 기록 중 남대문 밖에 살던 권생원의 여종 복점(福占)의 공초에 “홍문갑(洪文甲: 홍지영의 아들)의 아비는 일찍이 홍영산(洪靈山)의 집 여종과 유모의 일로 결성(結城)에 내려가 1년에 두 번쯤 올라와서 어머니를 뵙습니다”라는 진술이 결정적이다. 강완숙의 여종 정임(丁任)도 “제 바깥 상전이 갈만한 곳은 덕산(德山)의 농막(農幕)이나 결성(結城)의 수리(水里)와 오리(五里) 등지”라고 진술했다. 덕산 농막은 별라산집을 가리키고, 이와 별도로 결성의 수리와 오리라는 곳에 전장과 노비 등의 근거가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홍지영은 무과에 급제해 영산 현감을 지냈던 조부 홍영산, 즉 홍직호에게서 물려받은 전장(田莊)과 노비 관리를 위해 1801년 당시까지 가족과 떨어져 별라산과 결성 등지에 머물고 있었다. 홍문갑은 홍지영의 아들 복자 홍필주의 초명이다.

조부 홍직호가 영산 현감을 지냈고, 그는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홍낙성의 서제(庶弟)였다. 그 아들 홍낙풍은 현감을 지낸 기계(杞溪) 유씨(氏) 욱기(郁基)의 딸과 혼인했다. 홍지영은 그 홍낙풍의 아들이었다. 그런 그를 두고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홍지영이 내포 지방의 지체 낮은 외교인 향반(鄕班)이며, 순박하지만 어리석고, 신앙생활에도 우유부단했던 인물로 묘사했다. 그는 강완숙이 천주교를 믿는다고 하여 쫓아내기까지 한 인물로 그려졌다.

강완숙은 1792년 이후 어느 시점에 남편 홍지영을 남겨두고 상경하는데, 남편에게 쫓겨난 여자가 시어머니와 전처 소생 아들 홍필주를 데리고 올라왔다. 뭔가 앞뒤가 안 맞아 석연치가 않다.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여장부의 기질이 다분했던 강완숙은 왜 남편만 남겨두고 훌쩍 상경했을까? 여기에는 분명 우리가 잘 모르는 속사정이 있음에 틀림없다.

다시 「수기」로 돌아가, 1792년 1월 3일 자 보고에서 박종악은, 충청도 사학의 종장(宗匠)이라는 홍낙민(洪樂敏)이 12월 10일에 예산에 내려와 수령과 대면하고 관아에서 묵어 잔 뒤에, 11일에 예산 호동(狐洞), 즉 여사울에 도착해 노비 박꽁꽁의 집에 묵은 동향을 적었다. 이어 19일에는 “그 서족(庶族)인 덕산 별라산에 사는 홍지영의 집을 방문하였다”고 했다. 별라산은 내포 지역 교회에서 홍낙민이 한 차례 내려올 때마다 순방할 만큼 비중 있는 곳이었고, 그곳의 책임자가 홍지영이었다.

그는 과연 무식하고 신앙심도 약하며, 천주교를 믿는다고 아내를 내쫓기까지 했던 인물이었을까? 쫓겨났다는 그의 아내 강완숙은 어째서 굳이 성정이 만만찮았던 시어머니와 전처 소생의 아들까지 데리고 상경 길에 올랐을까? 족보상 1819년까지 살아있던 것으로 나오는 홍지영의 부친 홍낙풍은 왜 이들과 함께 살지 않았을까? 1801년 당시 「사학징의」에 천주교 관련 인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나오는 또 다른 홍낙풍은 누구인가? 우리는 연쇄적인 질문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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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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