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은 누구의 땅인가
'완전' '거룩' 뜻 지닌 예루살렘 , 유대교·이슬람·기독교 얽히며 "누구의 聖地냐" 두고 싸움
美 대사관 이전 논란도 가세하며 "국제사회 공동관리" 의견 묵살, 무장봉기 우려만 갈수록 커져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예루살렘의 역사는 극적(劇的)이다.
마치 누군가 정교하게 짠 대본 같다.
유일신(神), 두 민족, 그리고 세 종교가 수천 년간 한데 얼려 크고 작은 서사(敍事)를 만들어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 속에는 '평화' '완전함' 또는 '거룩함' 등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많은 종교인에게 예루살렘은 평생 순례하고 싶은 영성의 고향이기도 하다.
핵심은 동(東)예루살렘 올드 시티다. 성전산(Temple mount)이라 불리는 안쪽 옛 터에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10세기, 그 바위 위에 솔로몬은 성전을 세웠다. 같은 자리에서 성전의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다. 결국 서기 72년 로마는 헤롯 성전을 무너뜨렸고, 7세기에 이르러 폐허 위로 이슬람의 역사가 덧대어졌다. 옛 유대 성전 터 위에 이슬람 성지가 들어섰다. 지금은 알 아크사 사원이 황금의 돔 사원과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유대인들은 옛 성전 서쪽 벽(통곡의 벽) 앞에 모여 메시아의 임재와 성전의 재건을 대망한다. 그뿐이랴. 성전산 옆, 성묘교회를 중심으로 예수 십자가의 흔적들이 이어진다. 유대교와 이슬람 그리고 기독교가 한자리에 겹쳐 있다. 지구 상에 이렇게 깊게 종교적 자취가 모여 있는 곳이 또 있던가?
예루살렘은 비극(悲劇)의 무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이 도시를 각자 자신들의 수도로 선포하며 양보 없는 싸움을 해왔다. 2000년 9월, 이곳에서 시작된 제2차 인티파다(무장봉기)로 4000명이 숨졌다. 이전부터 테러와 살상도 그치지 않았다. 거룩한 도시에서 사람들은 목숨을 잃어왔다. 선민(選民) 의식에 기대어 약속의 땅을 고수하려는 이스라엘과, 이슬람 성지를 침략자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무한 반복 중이다. 유대 성전 터 위로 이슬람 사원이 올라타 있으니 나누어 가질 수도 없다. 빼앗느냐, 빼앗기느냐의 싸움에서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유태인들의 성소인 '통곡의 벽'과 이슬람교의 성지 '오마르모스크'
답은 있다. 이 도시를 누구의 소유로도 인정하지 않고 국제 사회가 공동 관리하면 된다. 일체의 무기 반입을 금지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각자의 종교에 따라 성지를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제안도 이미 오래전 논의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은 바로 일축했다. 이 와중에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텔아비브에 있는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다시 3차 인티파다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전황 (戰況)은 악화되고 있다.
예루살렘은 교훈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건넨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가르친다. 어쩌면 신(神)은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성지를 일부러 이곳으로 모았는지도 모른다. 땅에 매몰되어 벌이는 분쟁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계시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정작 중요한 것은 성지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과 평화임을 언젠가는 깨닫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선각자들이 있었다. 땅을 건네주고서라도 평화를 얻겠다던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수상은 오슬로 협정을 이끌어냈지만 유대 근본주의자에게 생명을 잃었다. 회색분자라는 오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존해야 한다고 소리쳤던 팔레스타인 출신 에드워드 사이드 교수도 이미 타계했다. 갈등이 심화되는 비극의 시대, 예루살렘은 라빈과 사이드의 후예를 기다리고 있다. 민족과 종교의 정수(精髓)가 고작 1㎢도 안 되는 올드 시티에 달려있다는 것은 자존심 문제다. 사람을 살려내고, 평화를 세우는 사명이 종교의 본령이라면, 언젠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 땅을 둘러싼 갈등이 그치고 평화가 도래하는 날, 그날에야 비로소 예루살렘은 진정한 성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