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64. 황사영의 도피를 도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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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1:17
신유년 체포령 내리자 상복 입고 김한빈과 배론으로 피신하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4. 황사영의 도피를 도운 사람들
2021.08.22발행 [1626호]
▲ 황사영이 신유박해를 피해 상복을 입고 성묘 가는 행색을 꾸려 배론으로 피신하던 중 경기도 평구에서 김한빈을 만나 동행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
▲ 황사영 초상화 |
한꺼번에 터진 제방
신유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조정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11월에 국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12월 17일에 최필공이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12월 19일 새벽, 최필제의 약방에 모여 기도하던 사람들이 기찰 중이던 포졸들에게 적발되었다. 새해 1월 10일 정순왕후는 천주교인의 전면적 색출을 위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의 연좌제 실시를 윤음으로 선포했다.
급박한 상황에 정약종은 불안감을 느꼈다. 1월 19일, 자신의 집에 보관 중이던 교회 서적과 성물, 주문모 신부의 편지와 신자들 사이에 오간 글이 가득 담긴 상자를 안전한 곳에 옮기려다가 운반 도중 적발된 이른바 책롱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은 가뜩이나 들끓던 여론에 불을 붙였다. 천주교 배척 상소가 조야(朝野)에서 일제히 빗발쳤다. 검거 선풍이 불고 삼엄한 체포령이 내리자, 천주교 수뇌부는 일체의 활동을 중지하고 지하로 들어가 숨을 죽였다.
정약종의 책 상자 속에서 조정이 그토록 찾던 주문모 신부의 편지뿐 아니라 다산과 황사영의 편지까지 나왔다. 정약종의 일기장도 있었다. 황사영은 책롱 사건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당일 집을 떠났다. 1월 20일, 그는 집 근처 제자 김희달의 집에 가서 잤다. 혹시 있을지 모를 기습 검거에 대비해 인근에 은신하며 사태를 관망하려 한 것이다.
당시 포도대장 이유경(李儒敬, 1747~?)은 사건의 파장이 클 것을 우려해 문제를 자기 선에서 덮으려 했다. 그 일로 그가 파직되고, 2월 5일 이후 박장설과 이서구, 최현중 등의 상소가 잇달아 올라가자, 2월 9일 사헌부는 마침내 이가환과 이승훈, 정약용 등의 체포와 국문을 주청했고, 이들은 2월 10일에 체포 수감되었다. 2월 11일에는 권철신과 정약종이 끌려왔다.
2월 10일, 국문장으로 끌려 온 정약용 앞에 당국은 불쑥 정약종의 책 상자에서 나온, 다산이 황사영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내밀었다. 둘의 관계를 묻자 다산은 “저와는 5촌으로 이모의 외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더 가깝게 조카사위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좀더 먼 쪽을 택했다. 황사영의 편지도 같이 내밀어, 서찰 속 내용으로 심문이 진행되었다.
잠행과 피신
2월 10일 국청(鞫廳)이 설치되자, 줄줄이 끌려온 신자들이 혹독한 고문 아래 내지르는 신음과 비명이 국청을 메웠다. 매를 못 견뎌 줄줄이 부는 진술 속에서 황사영의 이름은 빠지는 법이 없었다. 심문과 문초가 계속될수록, 교계에서 황사영의 위상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강완숙은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의 체포 직후인 2월 10일에, 체포령이 내린 황사영을 계동(桂洞) 용호영 인근의 사학 매파 김연이의 집으로 숨겼다. 중인 신분으로 교계의 지위가 가장 높았던 이합규와 김계완도 강완숙의 지시에 따라 이 집에 합류했다. 이합규는 이용겸(李用謙), 또는 이동화(李東華)란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고, 김계완은 김백심(金百深)과 김심원(金深遠) 같은 여러 이름을 바꿔 쓰는 통에 당국을 혼란스럽게 했지만, 사실은 같은 사람이었다. 이들은 너무 다급해 멀리 달아날 시간조차 없어 관부의 턱밑으로 숨어든 것이었다. 세 사람은 강완숙이 뒷날 공초에서 정광수와 함께 남자 교우 중 가장 높다고 꼽았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서울 지역 천주교계의 핵심 중 핵심이었다. 이들마저 체포되면 서울 교회 조직이 완전히 와해되어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고 만다는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황사영은 이씨의 호패를 차고 이서방으로 행세하며, 때를 보아 지방으로 종적을 감출 계획을 강완숙과 미리 상의한 상태였다. 이날 밤 황사영은 집에 보낼 편지를 써서 강완숙에게 보냈고, 강완숙은 권철신 집 여종 구애(九愛)를 시켜 편지를 전달했다.
2월 11일, 포도청의 포교들이 계동까지 들이닥쳐 이들이 숨은 동네를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불안한 마음을 못 이겨 삼청동 산 위로 달아나 산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날이 저물자 산에서 내려온 세 사람은 적선동 십자교 근처로 돌아 나와 김가 성을 가진 교우의 집으로 들어갔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주인은 세 사람을 나가 달라며 쫓아냈다. 몰려다니다가는 더 큰 의심을 사겠다 싶어 이들은 그곳에서 각자 헤어졌다. 여기까지는 이합규와 김계완, 그리고 황사영의 공초를 맞춰서 재구성한 내용인데, 기억의 착오로 세 사람의 진술에는 동선과 날짜가 얼마간 차이가 있다.
황사영은 상황을 알아보려 밤중에 석정동에 사는 권상술의 집으로 찾아가 하루를 묵고, 새벽에 그 집을 바로 나왔다. 황사영은 동대문 안쪽 훈련원 근처 황정동(黃井洞), 즉 노랑우물골에 살던 각수 송재기의 집으로 숨어들어 사흘을 더 머물렀다. 황정동은 위치가 불분명한데, 「추안급국안」 중 김한빈의 공초에 송재기의 집이 이교(二橋) 즉 동대문에서 종로 쪽으로 두 번째 다리가 놓인 인근에 있었다고 했으니, 황정동은 훈련원 자리인 지금의 국립의료원 서쪽 방산동 일원을 가리키는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대문과 광희문이 지척의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근처로 나온 것은 도성 탈출을 용이하게 하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황사영의 탈출을 돕기 위해 아현의 김의호가 건너왔다. 정약종 집 행랑채에 살던 공주 포수 김한빈도 달아나 송재기의 집으로 왔다. 김한빈이 황사영을 보고는 “여태 여기에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상놈 행세로 잡물을 팔며 한양에 숨는 방안과, 사학하는 무리가 없는 강원도 산속에 숨는 것 중에 사정이 다급했으므로 바깥으로 달아나는 쪽에 중의가 모아졌다.
김의호는 황사영에게 머리를 깎아 중 행세를 하자고 제안했다. 황사영은 중은 우리의 도가 아니니 그럴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상복을 입고 상주 행세를 하는 것은 어떠냐고 하자 그제서야 황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사영이 송재기의 집으로 숨은 시점은 전후 사정을 따져볼 때 2월 13일 경이었을 것이다.
극적인 탈출
김의호가 그 길로 바로 나가 자신의 돈과 송재기의 돈을 합쳐 베를 사왔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송재기의 처와 최설애, 김한빈의 딸이 힘을 합쳐 바로 상복을 지었다. 황사영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아름다운 수염은 족집게로 뽑아 눈에 띄는 특징을 가렸다. 이미 황사영에 대한 검거령이 내린 터여서 도성문마다 그의 용모파기가 나붙었을 것이었다.
황사영은 미리 준비해둔 이씨 성의 호패를 지닌 채 성묘 가는 행색을 꾸몄다. 김한빈의 18세 난 아들 김성분이 시종 행세로 술병을 들고 따랐다. 광희문 쪽의 경계가 삼엄했던지 황사영은 창의문을 통해 김한빈과 함께 도성을 극적으로 빠져나왔다.
황사영은 김한빈과 헤어져 경기도 양주 땅에 속한 평구(平丘: 오늘날 남양주시 삼패동)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김한빈은 포수여서 산속 지리에 훤해 깊은 산 속으로 은신하려 할 경우 아무래도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두 사람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따로 떨어져서 평구까지 가서 그곳에서 다시 합류했다.
황사영이 김한빈과 함께 도성을 벗어난 것은 2월 15일 경이었을 것이다. 이후 제천 배론 땅 김귀동의 옹기점을 향하고 있던 2월 25일, 국청에 나갔던 대신들이 대왕대비를 뵙고 사학죄인의 국문 상황을 보고했다. 이때 대왕대비의 하교가 이랬다. “황사영을 여태 체포하지 못했다니, 어찌 매우 놀랍지 아니한가? 국가의 기강이 이럴 수가 있는가? 각별히 엄히 신칙하여 조속히 체포해 들이도록 하라. 또 만약 지체된다면 엄벌에 처하리라.”
대왕대비의 이 같은 질책이 있자 국청에서는 황사영을 잡기 위해 더욱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잡혀 온 신자들은 저마다 다른 진술로 황사영에 대한 추적을 교란시켰다. 대부분 실제로 황사영이 간 곳을 몰라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황사영의 행선지를 알았을 것이 분명한 송재기는 황사영이 가평 읍내에서 위로 20리 남짓 가면 있는 큰 산에 숨었을 것이라고 속여서 진술했다. 변득중은 장덕유와 함께 기찰포교를 대동하고 황사영이 숨을만한 곳을 몇 곳 지목하여 함께 다니면서 이들의 힘을 뺐다. 남제(南悌)는 황사영 어미의 말이라면서, 외사촌인 이학규의 집, 정동 윤종연의 집, 경영교 이청풍의 집 중 하나에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를 앞세워 이 세 집을 다 돌았지만 허탕이었다. 황사영 집 사당터에 부쳐 살던 남송로는 강화(江華)에 있는 삼촌 황석필의 집과 서산(西山)에 있는 그의 선영, 공주에 사는 그의 6촌 대부로 자를 사길(士吉)이라 하는 황생원(黃生員)의 집 등을 지목했고, 그때마다 포졸들은 멀리까지 헛걸음을 계속 해야 했다.
2월 26일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참혹한 고문을 못 견뎌 같은 날 감옥에서 죽었다. 정약종의 문서 속에는 강완숙과 주고받은 언문 서찰도 들어있었다. 교회의 일을 긴밀하게 상의한 내용이었다. 「일성록」 1801년 2월 25일 자 기사에 그 내용이 나온다. 강완숙의 신변 또한 무사할 수 없어 마침내 그녀도 2월 26일에 붙잡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배론에 숨은 황사영은 이들의 죽음을 까맣게 몰랐다. 어떤 검거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사영의 종적만 계속해서 묘연하자, 조정은 몸이 달았다. 신유년의 옥사는 황사영과 신부를 잡아야만 끝이 날 터였다. 의금부의 집요한 추적에도 불구하고 황사영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어떤 단서조차 잡히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