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11) 생 질의 마이스터 ‘클로비스 왕에게 세례를 주는 생 레미’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11) 생 질의 마이스터 ‘클로비스 왕에게 세례를 주는 생 레미’
유럽의 권력자 클로비스 왕, 그리스도교 수호자로 나서다
- 생 질의 마이스터, ‘클로비스 왕에게 세례를 주는 생 레미’, 61.5×45.5cm, 1510년 경, 워싱턴 국립미술관, 미국.
이민족의 침입, 유럽을 흔들다
5~8세기에 있었던 이민족들의 대이동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자리에 여러 이민족이 왕국을 세우는 기회가 되었다. 멸망한 로마 제국의 국경은 공화정에서 제국 시대로 바뀌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이후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기점으로 하고 있었다. 국경 밖에는 로마 제국과 마주하던 게르만족이 마을공동체를 이루어 살았고, 그 너머에는 동-서고트족, 반달족, 비스고트족, 프랑크족, 앵글족, 색슨족 등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제국의 주력 부대는 이들의 남하를 저지하는 수비군단으로 그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외부로부터 다른 물리적인 힘이 가해지기 이전까지 이런 관계는 그런대로 평화롭게 유지되었고, 오히려 제국의 국경과 근접해서 살고 있던 게르만 공동체는 로마 문명과 친해졌다. 4세기 초에는 로마의 큰 주에서 게르만인들을 노동자로, 용병으로 쓰는 사례가 많아졌다. 5세기에 이르러 제국의 차원에서 이민족들의 제국 내 침략에 대한 방어의 많은 부분을 게르만인들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로마인들에게 그들은 몇 가지 점에서 ‘야만’에 해당되었다. 첫째, 공동체를 법률에 기반하여 운영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냥, 수렵을 하던 민족이었고, 일부일처제의 가족 제도와 수직적인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후에 그리스도교의 교계제도와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를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둘째, 그리스도교와 같은 고등종교가 없었다. 토테미즘과 애니미즘 같은 자연종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셋째, 라틴어와 같은 언어체계가 없어 문학이라는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게르만을 비롯한 이민족들은 ‘야만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마 제국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내부의 혼란과 모순이 심화하고, 각 체계가 약화하면서 점차 멸망의 조짐을 보였다.
여기에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역에서 발흥한 유목 기마 민족이었던 훈족의 서진은 로마 제국 국경에 있던 여러 이민족의 등을 제국의 영토 안으로 밀어 넣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2세기에 들어서면서 훈족의 서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375년, 훈족은 동고트족을 압박하여 그들의 땅 대부분을 빼앗았고, 여기에 놀란 서고트족은 이듬해(376년)에 살던 곳을 떠나 일부는 서쪽으로, 일부는 동로마 발렌티우스 황제의 허가로 다뉴브강을 건너 트라키아 지방으로 이주했는데 이것이 민족 대이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약 100년간에 걸쳐 이민족들은 서로마 제국의 영내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되어갔다. 425년부터 반달족이 스페인을 짓밟고 이탈리아의 곡창지대인 북아프리카를 손에 넣었다. 이 시기, 히포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망했다(430년).
훈족은 동고트족을 정복한 후에도 서진을 계속했고, 급기야 452년에는 로마까지 밀고 들어왔다. 놀란 레오 대교황이 나가서 담판을 짓고 물러가게 했다. 바티칸박물관 라파엘로의 방 중 엘리오도로의 방에 그려진 ‘레오 대교황과 아틸라의 만남’은 바로 그 내용을 담고 있다. 훈족이 쇠퇴한 후에도 동고트족은 결국 로마를 쓰러트렸고, 랑고바르드족과 함께 이탈리아 반도를 접수했다. 서고트족은 이베리아 반도를, 반달족은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멀리 북아프리카를, 프랑크족은 북부 갈리아(파리, 노르망디, 루아르, 샹파뉴)를 포함한 지금의 프랑스 땅 대부분을, 부르군드족은 남부 갈리아를, 앵글족과 색슨족은 멀리 영국을 접수하고 각기 왕국을 세웠다.
왕국들은 흥망성쇠를 거듭했고, 계속되는 혼란 속에 ‘유럽’은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한 번 세워진 후 망하지 않고 빨리 안정적인 국가의 면모를 갖춘 후,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한 왕국이 있었으니 바로 프랑크 왕국이다. 오히려 점차 역사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그 이유가 오늘 소개하는 작품의 내용이다.
클로비스 왕, 로마 문화를 전파
프랑크 왕국을 세운 클로비스(Clovis)는 원래 프랑크족의 족장이었다. 그는 흩어져 살던 프랑크족들을 모아 486년에 오늘날의 프랑스 땅에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메로빙거 왕조를 설립했다. 그가 왕국을 세우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가 이미 가톨릭 신자였다는 말도 있고, 알라마니족을 정복할 때 신의 도움이 있었다는 말도 있다. 여기에서 그는 ‘제2의 콘스탄티누스’라고 불리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리고 라틴어를 공식 언어로 도입하고, 로마 제국의 많은 제도를 받아들였다.
이를 계기로 교황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미래 왕국의 발전에 중요한 포석을 놓았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주교들로부터 로마 제국의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았고, 동로마 황제로부터는 ‘명예 집정관’의 칭호까지 받았다.
클로비스 왕은 유럽 내 여러 이민족 왕국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다. 6세 후반 이슬람의 유럽 진출을 막아냈고, 주변 국가들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로마 문화를 전파했다. 새판이 짜인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공동의 정신과 가치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따라서 클로비스 왕의 세례는 프랑크 왕국의 그리스도교화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프랑크 왕국의 지속적인 번영과 유럽의 권력자로 부상하는 시발점이 되는 한편 바티칸의 장자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의 중대한 변곡점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파리에서 활동한 익명의 화가
이 한 장의 작품은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생 질의 마이스터 작, ‘클로비스 왕에게 세례를 주는 생 레미’다. 작가인 ‘생 질의 마이스터(Matre de Saint Gilles)’는 익명의 화가다. 15세기 말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프랑크-플레밍고 사람으로 추정된다. 휘고 반 데르 후스(Hugo van der Goes)가 있던 플랑드르에서 그림 수업을 받고, 일찌감치 파리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많은 작품 속 배경이 파리와 파리 주변의 기념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혹적이면서도 평온한 이미지와 주인공들의 얼굴은 프랑스인과 프랑스 문화를 모델로 하고 있다.
‘생 질의 마이스터’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 파리시에 있는 생 루와 생 질 성당(glise Saint-Leu-Saint-Gilles)을 위해 그린 일련의 그림들 때문이다. 모두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두 점은 런던 국립미술관에 있고, 또 다른 두 점은 워싱턴 국립미술관 내에 있다. 모두 1500년경에 제작한 것으로, ‘생 질의 미사’와 ‘생 질과 암사슴’은 런던에, 도상학적으로 같은 계획안에 포함되어 같은 장소에 두기 위해 제작한 ‘생 레미에 의한 어떤 아리안의 개종’, ‘생 레미의 클로비스 세례’는 워싱턴에 있다.
이 작품들 외에 몇 개의 다른 작품들을 빼고는 작가에 대한 정보가 매우 빈약하다. 그가 파리에서 활동한 시기도 길게 잡지는 않는다. 1468년 플랑드르에서 태어나, 1490~1500년에 파리에서 활동했고, 1530년경 파리에서 사망한 것으로 본다.
작품 속으로
작품의 배경은 프랑스 샹파뉴 지방, 랭스대교구에 있는 노트르담 드 랭스 주교좌성당이다. 496년 클로비스 왕이 3000여 명의 부하와 함께 랭스대성당에서 생 레미(성 레미지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다. 원래 이곳은 고대 로마 시대 목욕장이 있던 장소였다. 후에 클로비스 왕의 세례를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이 세워지고, 역대 프랑스 군주들이 대관식을 치르는 장소가 되었다.
작품 속에서 클로비스 왕은 왕관을 쓴 채 고대 로마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목욕탕 안에 들어가 침례를 받고 있다. 생 레미 주교와 그 뒤에는 사제단이 있다. 입고 있는 제의와 전체적인 옷 색상을 통해 템페라에 기름을 사용하여 디테일하고 화려함을 더했음을 알 수 있다.
왕 뒤에는 왕비로 보이는 여성과 그 외 인물들의 진지한 표정과 오르간 위에 올라가 내려다보고 있는 구경꾼들을 통해 현실성이 가미되고, 왼쪽 배경에 병사들을 축소시켜 그린 것 같은 전형적인 플랑드르 학파의 특징들이 모두 드러난다. 또 플랑드르의 초상화 문법에서 보는 4분의 3을 차지하는 인물 묘사의 특징이 클로비스와 주교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작가는 주교가 마치 아들 클로비스에게 세례를 주는 것처럼 표현했다. 목욕탕에 들어간 아들은 다소 왜소하면서도 다부져 보이고, 물을 부어 세례를 주는 아버지는 듬직하게 보인다. 바티칸의 장자를 보는 것 같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7월 26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