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1) 조셉 셀레스틴 프랑수아의 ‘1801년의 종교협약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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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1) 조셉 셀레스틴 프랑수아의 ‘1801년의 종교협약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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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1) 조셉 셀레스틴 프랑수아의 ‘1801년의 종교협약 비유’


프랑스 혁명 정부의 기세에 밀려 불리한 조약을 맺는 교황청

 

 

조셉 셀레스틴 프랑수아, ‘1801년의 종교협약 비유(Allegory of the Concordat of 1801)’, 1802년, 프랑스 말메종 성(城) 국립박물관.

 

 

1799년 8월 29일 비오 6세 교황이 프랑스 디종에서 선종한 후, 추기경회의 의장 주세페 알바니 추기경이 소집한 콘클라베는 로마에서 열리지 못했다. 프랑스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가 지원해 주겠다고 하는 바람에 베네치아에서 열렸다. 그러나 콘클라베가 열리기도 전에 로마의 정치적 상황이 바뀌어 그해 9월 19일 프랑스군은 로마를 떠났고, 그달 30일 ‘로마 공화국’이 있던 자리에 나폴리 군인들이 주둔했다.

 

콘클라베가 예정됐던 베네치아에서 11월 30일 35명에 불과한 추기경들이 성 조르조 대수도원에 모였다. 대부분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이었다. 즉시 두 명의 추기경이 후보에 올랐다. 반프랑스파에 속하는 페라라의 대주교 알렉산드로 마테이(Alessandro Mattei)와 중도파에 속하는 체세나의 주교 카를로 벨리소미(Carlo Bellisomi)였다. 두 사람에 대한 이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이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콘클라베 총무 에르콜레 콘살비(Ercole Consalvi) 몬시뇰은 세 번째 후보로 이몰라의 주교 바르나바 키아라몬티(Barnaba Chiaramonti)를 제안했다. 투표 결과는 신속하게 세 번째 후보에게 전달되었다. 프랑스인 장 시프랭 모리(Jean-Siffrein Maury) 추기경도 선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비오 7세 교황, 교회 행정 개혁 나서

 

1800년 3월 14일, 키아라몬티는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외가 쪽으로는 전임 비오 6세와 친척 간이었고, 프랑스에서 서거한 그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비오 7세’로 결정했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체스코 2세는 새 교황에게 볼로냐, 페라라, 이몰라, 라벤나 동맹을 양도하라고 했고, 비오 7세는 거절했다. 실망한 황제는 교황의 대관식을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에서 하는 것을 금했고, 비오 7세는 성 조르조 대수도원의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새 교황은 몇 달간 베네토 지방에 머물며, 거의 모든 성당을 사목 방문했고, 모든 수도회의 순명 서약을 받는 동시에 백성의 지지를 받았다. 그 사이에, 젊은 시절 머물렀던 파도바의 성녀 유스티나 대수도원도 방문했다. 오스트리아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로 갔다.

 

교황은 베네치아에서 페사로까지 오스트리아의 프리깃 호위 함대를 타고 가서, 거기서부터 육로로 플라미니아 가(街)를 따라 로마로 향했다. 1800년 7월, 교황은 로마의 귀족과 백성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마침내 로마에 당도했다.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갔을 때 목자 없이 살았던 경험 탓인지, 로마의 백성은 눈물로 교황을 맞았다. 그러나 교황청의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프랑스인들이 남겨둔 약간의 돈은 나폴리 군대가 주둔하면서 모두 쓰고 없었다. 8월, 에르콜레 콘살비 추기경을 교황청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교황이 새로운 비서관을 임명할 때 통상 외세의 압력, 이 경우 오스트리아 제국의 압력을 받곤 했는데, 비오 7세는 그 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교황은 더는 연기할 수 없게 된 교회의 행정 개혁을 서둘렀다. 즉위 첫해인 1801년, 자의 교서 「가장 교양있는(Le pi colte)」을 통해 농업 부문과 오래된 일부 체제의 자유를 선언했다. 이것은 프랑스의 침공으로 빈곤해진 백성들의 물질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고, 유럽의 변화를 촉구하던 진보주의자들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다음으로 집중한 것은, 프랑스 교회가 처한 행정상의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정부, 가톨릭을 장악

 

1790년 7월 12일 프랑스의 혁명 정부는 프랑스 내 가톨릭교회를 정부에 종속시키고자 ‘성직자 기본법(Constitution civile du clerg)’을 발의, 시행했다. 그로 인해 교회는 분열되고, 무질서해져 어떤 교구는 주교가 없는 반면에 어떤 교구는 두 명 이상 되는 곳이 속출했다. 주교의 수를 135명에서 83명으로 줄이고, 각 교구를 데파르트망(혁명 정부가 정한 기본적인 행정 단위)에 맞추도록 하여 선거권을 가진 시민들이 주교와 교구 사제들을 선출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또 국가 재정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성직자의 생활을 보장해 주겠다며, 교회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교회 조직을 프랑스의 통치기구의 하나로 삼아 새로운 행정적ㆍ재정적 구조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또 성직자들에게 로마 교회의 뜻을 따를 게 아니라, 혁명 정부의 명령에 따를 것을 강요했다. 성직자들을 국가가 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얀센주의와 성직자의 결혼 관행이 퍼지고, 교회 내부적으로는 신자들 간 무관심 주의가 팽배해지며, 정부 입장에서는 독실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혁명 정부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교황이 뽑혔다는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정교 협약’이라는 이름으로 비오 7세에게 제안했다. 그즈음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인해 황폐해진 프랑스의 질서를 바로잡고, 국민 정서를 일치시키기 위해 교황의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조건이 모두 교황청에 불리한 것 천지였다. 교회 재산 몰수, 교황이 임명한 주교 파직, 성직자 기본법에 따라 충성 서약을 한 자만 주교로 임명하는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비오 7세는 프랑스에서 가톨릭교회의 명성을 회복하려는 보나파르트의 열망을 굳게 믿고, 많은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영적 유익을 앞세워 1801년 7월 15일 파리에서 소위 ‘1801년 종교협약’에 서명하고, 그해 8월 14일 비준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기해, 칙령 「그리스도의 교회(Ecclesia Christi)」로 이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렸다.

 

 

신고전주의 작가이며 초상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남부 네덜란드 출신의 역사 주제 또는 미니어처 화가이며 에칭가였던 피에르 조셉 셀레스틴 프랑수아(Pierre Joseph Clestin Franois, 1759~1851)가 그린 ‘1801년의 종교협약 비유(Allegory of the Concordat of 1801)’(1802년 작)이다. 프랑스 말메종 성(城) 국립박물관(Muse National du Chteau de Malmaison)에 소장되어 있다.

 

조셉 프랑수아는 신고전주의 양식에 따른 종교ㆍ신화 주제의 그림은 물론 초상화가로 알려져 있다. 담배공장을 경영하던 부친은 아들을 샤를루아에 보내 처음으로 드로잉을 공부하도록 했고, 조셉 프랑수아는 거기서 피에르 발타사르 드 블로크(Pierre Balthasar de Blocq)를 만났다. 11살에 안트베르펜(Antwerp) 미술아카데미로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거기서 신고전주의 양식과 루벤스를 배웠다. 그곳에서 8년간 공부한 뒤, 1778년부터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1781년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이후 독일을 여행하고 6개월간 비엔나에 있다가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왔다. 1789년에 다시 로마로 가서 3년간 더 공부한 뒤, 브뤼셀로 돌아와 아카데미와 그 지역 아테네움의 교수가 되었다. 1851년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작품은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비유하고 있다. 국가가 교회 재산, 성직자 임명 등 교회의 핵심 권한을 모두 갖겠다는 의미의 정교분리다. 그것은 ‘1801년의 종교협약’ 내용을 들여다보면 된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선언문으로 집약되는데, 우선 공화국 정부는 대다수 프랑스 백성이 믿는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로마 교회를 인정한다고 천명한다. 언뜻 보기에 대혁명으로 이루고자 한 탈그리스도교화의 실패와 국가교회를 세우고자 한 것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국가가 국민의 종교인 가톨릭 신앙을 인정하는 대신, 교황이 임명한 주교는 모두 사임하고, ‘성직자 기본법’에 따라 정부가 성직자 임명 개입권을 가지며, 빼앗은 교회 재산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대신, 정부는 주교와 본당 사제들의 생활비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교황은 가톨릭 전례의 완전한 자유를 희망했으나, 이것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교황은 몰수된 교회 재산에 대한 모든 청구를 포기하고, ‘1801년의 종교협약’에 서명했지만, 나폴레옹은 이후 77개의 부속 법령(Articuli Organici)을 만들어 교황을 유린하고 교회를 짓밟았다.

 

그림 속 배경은 제단 앞이다. 가톨릭이 프랑스 국민 대부분이 믿는 종교임을 인정하듯 위에는 성모 마리아가 있고, 아래 양쪽에 비오 7세 교황과 나폴레옹이 있다. 교황은 제단에 의지한 채 상대방을 묵묵히 응시하고, 나폴레옹은 성령으로 인도된 거룩한 사람으로 비유했다. 이곳이 제단이라는 것은, 아래 오른쪽 시종이 든 향로가 말해준다. 왼쪽 끝에 콘살비 추기경으로 보이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 뒤에 맹수로 보이는 짐승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교황과 추기경의 망토 아래에서만 평화가 있다는 듯 여인이 평화롭게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8월 29일, 김혜경 세레나(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부산가톨릭대 인문학연구소 연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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