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4) 프란체스코 포데스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 선포’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4) 프란체스코 포데스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 선포’
비오 9세 교황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교리’ 반포하다
- 프란체스코 포데스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 선포’(1859~1860), 바티칸박물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혁명 정부의 영향은 유럽 봉건주의 체제의 종말과 민족 자결주의가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의 통일된 민족 국가를 이룩하려는 열망은 특히 이탈리아를 자극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로마 제국 붕괴 이후 오랜 자치 국가주의를 넘어야 하고, 당시 북부 이탈리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를 몰아내야 하며, 교황청의 반대를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마르케주 안코나현의 작은 도시 세니갈리아 출신의 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 페레티(Giovanni Maria Mastai-Ferretti)가 제255대 비오 9세 교황으로 선출됐다. 콘클라베는 이탈리아 정치가 매우 불안정한 가운데서 진행됐고, 그래서 비(非)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의 많은 불참 속에서 진행됐다. 여기에서 54세의 젊은 추기경이 교황이 되어 교회사에서 성 베드로(34년) 다음으로 오래 재임한 교황(32년)으로 이름을 남겼다.
비오 9세 교황과 교황령
복자 비오 9세 교황은 선출과 동시에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이탈리아 반도에 불어닥친 자유와 통일의 열망과 그것을 실행해 옮기는 ‘부흥 운동(리소르지멘토)’과 맞닥트려야 했다. 신심이 깊고 지성과 인품을 두루 갖춘 교황은 모든 사람을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 교황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도 교황령 내에 수감 중이던 정치 사범들을 모두 사면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면된 ‘혁명주의자’들은 곧 과거 자신들이 하던 활동을 재개했고, 그것은 교황령의 종식에 불씨가 됐다.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을 위해 오스트리아가 차지하고 있던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탈환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비오 9세의 참여를 압박했다. 그러나 교황은 장화 반도뿐 아니라 보편 교회의 수장으로서, 현세의 국가주의를 초월하는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며, 더욱이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가톨릭 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에는 동참할 수 없다며 발을 뺐다. 민족주의가 팽배하던 이탈리아는 교황이 이탈리아를 배반했다고 외치며, 이참에 교황령의 종식을 부르짖었다.
한편, 비오 9세는 교황청의 영적인 독립을 주장하며 교황령을 헌법 정부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이탈리아 통일의 급물살 속에서 급진주의자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고 말았다. 1848년 11월 15일, 교황령의 초대 총리였던 로씨(Pellegrino Ross)는 암살되고, 다음날 스위스 근위대의 무장이 해제되며, 교황은 바티칸 궁전에 감금됐다. 평범한 사제복으로 갈아입고 겨우 로마를 빠져나와 나폴리 왕국의 가에타로 피신한 교황은 음모에 가담한 관련자 전원을 파문했다. 그 틈에 이탈리아 통일의 당위성을 설파했던 정치사상가 마치니(1805~1872)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탈리아 공화국’을 선포하고 수도를 로마로 지정(1849년 1월)했다.
교황은 프랑스 원정군의 도움으로 1850년 4월 12일 로마로 귀환했으나, 프랑스 혁명과 로마의 독립운동이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전통 사회는 물론 도덕과 종교 질서까지 붕괴할 것임을 예견했다. 17개월의 망명에서 돌아온 뒤, 앞서 로마 공화국에서 벌인 여러 가지 사업을 폐지하고 복구를 단행했다. 국가 재정은 엄청난 빚으로 파탄 상태에 가까웠고, 행정은 말이 아니었다. 교황의 지속적인 개혁과 통제하에서 경제와 행정은 8년 만에 회복 분위기로 돌아섰고, 시민들의 세금 부담은 유럽 평균보다 훨씬 낮았다. 그 결과 외국인 거주자들이 대거 로마로 유입했는데, 다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문화·개량 사업 적극적으로 펼쳐
비오 9세 교황은 1850년 8월 14일 유럽에서 처음으로 청각 장애인들을 보호하고 교육하기 위한 법적 규정을 마련했다. 또 그해 9월 12일 자의 교서를 통해 교황청 자문위원회를 재구성하고, 재정위원회를 신설하며, 광범위한 사면을 단행했다. 그 덕분에 1850년대 교황령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가 있었다. 19세기 중반, 교황령에서 시작되거나 이룩한 주요 공공사업은 ①페라라와 오스티아 습지 간척 사업 ②라벤나에서 안코나까지 항구를 확장하고, 일부 항구에 새 등대 설치 ③알바노와 아리챠 구간을 포함해 20여 개의 주요 도로에 고가 건설, 도로 현대화 ④통신망을 구축해 교황령 내 모든 주요 시설과 직접적인 소통 모색 ⑤1823년 7월 15일 화재로 새로 지은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 축성(1854년 12월 9일) ⑥철도 건설 등이다.
1852년 1월 비오 9세 교황은 피렌체, 모데나, 파르마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우표 사용을 도입했다. 1853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교황령은 면적 기준으로 장화 반도에서 나폴리와 사르데냐 왕국에 이어 세 번째 국가로 이름을 올렸다. 비오 9세는 재임 기간 장애인을 위한 전문학교와 노동자들을 위한 야간 학교를 신설해 교육 혁신을 가져왔다. 종일반 어린이 학교를 개설해 종일 일하는 학부모들의 고충을 해결해줬다. 대학교 교직원들의 급여를 인상하고, 대학 교육에 지질학, 농업 과학, 고고학, 천문학 및 식물학을 추가했다. 산부인과 병원, 박물관과 천문대도 여럿 문을 열었다. 신학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엄격한 양성을 요구했고, 해외 유학생들에게는 아낌없는 재정적 지원을 해 줬다.
비오 9세 교황은 대다수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예술을 후원하는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모든 예술 분야를 후하게 지원하고, 각 분야의 대표에게는 많은 상을 수여했다. 로마에 있는 두 개의 극장은 교황의 모든 검열에서 면제됐다. 역사 유적지에 있는 성벽, 분수, 도로와 다리들도 복원하며, 로마의 유적지 발굴을 명해 많은 중요한 유물들을 발견하도록 했다. 당시 무너질 위기에 처한 콜로세움을 보수했고, 카타콤바 발굴을 위해 엄청난 돈을 쓰기도 했다. 1853년 고고학 위원회도 신설해 성 칼리스토 카타콤바 발굴을 주도했다. 페루지아, 오스티아, 베네벤토, 안코나, 라벤나 등지에서 에트루리아 유적과 고대 로마의 기념물을 발견, 복원하기도 했다. 교황령이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기 20년 전, 로마 외곽 대부분 지역에서 개량 사업이 완성되고, 로마시 상수도 사업은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유럽의 어느 사회보다도 로마를 비롯한 교황령에서 진행된 현대화는 괄목할 만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비오 9세가 가톨릭 신자들의 신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1854년 12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선포한 것이다. 400여 개 언어로 번역된 교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해 선포된 이 교리는 뒤이어 개최하게 될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교리는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토대로 선포됐고, 이 두 가지 권한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룬 가장 큰 주제였기 때문이다.
역사 회화의 마지막 주자
소개하는 작품은 하예츠, 베추올리와 더불어 1800년대 이탈리아를 이끈 최고의 화가로 알려진 포데스티(Francesco Podesti, 1800~1895)가 그린 프레스코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 선포’(1859~1861)이다.
작가는 나폴레옹 시절, 안코나의 소박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재봉사로 도시에 주둔한 프랑스 군대와 수비대의 군복을 수선하는 일을 했다. 파비아에서 군(軍) 건축을 공부하던 중 부모를 모두 잃고, 그 시기에 회화에 대한 예술적 재능을 보여, 안코나시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으로 로마의 성 루카 아카데미에서 10년간 고전 미술과 역사 회화를 공부했다. 그 시기에 카노바를 만나 부정(父情)을 느끼며 예술가로 성장했고, 다비드(Jacques-Louis David)와 이상을 공유하는 친구가 되었다.
포데스티는 1826년부터 예술 공부를 위해 피렌체, 피사, 볼로냐, 파르마, 베네치아와 밀라노 등지를 여행했다. 나폴리, 폼페이, 에르콜라노 등도 방문해 고대 미술을 만났다. 이후 그는 작품을 통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역사적 낭만주의에 권력과 감정의 조화를 모색했다. 그것은 시민 정신으로 일컫는 용기와 자유에 대한 사랑을 부각하는 것이기도 했다.
학문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에서 ‘역사 회화’의 마지막 주자로 런던과 파리 등 유럽 전역에서 크게 명성과 영광을 얻었고, 1895년 95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바티칸박물관, 라파엘로의 방으로 가는 길목에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이 선포한 ‘마리아 교의’ 장면이 그려진 대형 프레스코화가 있다. 1861년 중요한 교황령이었던 로마시를 이탈리아 왕국에 빼앗긴 민감한 순간에 안코나 출신의 프란체스코 포데스티가 방의 세 벽면에 교황의 권한을 암시하는 세 개의 벽화를 그린 것이다. ‘옥좌에 앉은 교회’, ‘교의 선포’, ‘동정녀의 대관식’에 대륙들이 무릎을 꿇고 있다.
이 작품은 ‘교의 선포’에 해당하는 것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께 둘러싸인 동정 마리아를 중심으로 천상 그룹과 지상 그룹으로 나뉘어 예언자, 사도 등 구약, 신약의 인물들과 당시 교회를 이끌었던 교회 인사들이 한자리에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3일, 김혜경(세레나, 부산 가톨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