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웅모 신부의 아름다운 성화 아름다운 인생 (28) “제가… 많이…많이… 기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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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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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9 17:11
정웅모 신부의 아름다운 성화 아름다운 인생 (28) “제가… 많이…많이… 기도할게요!”
죽음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 모습 묘사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에게 잘못한 이들 용서해 주며
끌어안으려는 듯한 모습 하고 있어
발행일 2012-03-11 [제2786호, 13면]
▲ 생 슐피스 성당.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이 십자고상은 생 슐피스(Sanint Sulpice) 성당의 왼쪽 작은 제단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성당은 파리의 중심가에 있으며 성당 마당과 재래시장이 붙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러나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북새통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고요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이 십자고상 앞에 서면 그 같은 분위기를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이 조각상은 십자고상이지만 고통 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은 아니다. 그분의 몸은 십자가 위에서 혹독한 고통을 당하시며 일그러진 것이 아니라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무신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마치 깊은 명상 속에 젖어 있는 듯하다. 또한 그분께서는 양손을 활짝 벌려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며 세상의 모든 사람을 끌어안으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십자고상에는 인류 구원을 위해 희생되신 예수님의 모습뿐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모습이 함께 묘사돼 있다. 철저하게 하느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했던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 위에서 모두 막을 내린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막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 안에서 자신을 낮추어 끊임없이 내어주는 삶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을 십자가와 부활로 증명해 주셨다.
본당에서 주일 교중미사를 마치고 나면 이런 저런 질문을 하는 꼬마 친구들이 있는데 가끔은 매우 당혹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지난달에도 가족과 함께 성당에 온 네 살 된 미카엘라가 중요한 질문이 있다고 했다. 어떤 질문이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눈을 내리깔고 작은 손만 만지작거리며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아이는 더듬거리며 “팬티…, 팬티…, 예수님은… 왜… 팬티만 입고 있어요?”라고 물었다. 아이의 눈에는 성당 제대 뒤의 커다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벌거벗은 예수님의 모습이 늘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나는 꼬마 친구의 질문에 바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그 또래의 아이가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난감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십자고상을 보았지만 왜 예수님께서 팬티만 입고 계시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님의 복장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다음 주일에 오면 답변을 해 주겠다며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주간에 동기 신부들에게 아이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이 별로 신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성서학자인 형님 신부님께 도움을 요청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날에 옷은 흔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옷이 귀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들의 겉옷뿐 아니라 속옷까지도 모두 벗겨 서로 나누어 가졌다(요한 19,23-24참조). 나쁜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벗겨 가지고 갔지만 오늘날 대분의 십자고상에서는 그래도 팬티 한 장은 걸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만난 꼬마 친구에게 위 답변에 몇 가지를 보태어 의기양양하게 예수님의 팬티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한참 동안 내 설명을 듣고 난 후, 아이는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추운데… 팬티만… 팬티만… 입은 예수님이… 불쌍해요. 예수님 위해서… 제가… 많이…많이… 기도할게요!”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예수님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면서 주님을 위해 많이 기도하겠다는 미카엘라를 바라보면서 왜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그토록 사랑하셨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 조각상은 십자고상이지만 고통 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은 아니다. 그분의 몸은 십자가 위에서 혹독한 고통을 당하시며 일그러진 것이 아니라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무신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마치 깊은 명상 속에 젖어 있는 듯하다. 또한 그분께서는 양손을 활짝 벌려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며 세상의 모든 사람을 끌어안으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십자고상에는 인류 구원을 위해 희생되신 예수님의 모습뿐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모습이 함께 묘사돼 있다. 철저하게 하느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했던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 위에서 모두 막을 내린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막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 안에서 자신을 낮추어 끊임없이 내어주는 삶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을 십자가와 부활로 증명해 주셨다.
본당에서 주일 교중미사를 마치고 나면 이런 저런 질문을 하는 꼬마 친구들이 있는데 가끔은 매우 당혹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지난달에도 가족과 함께 성당에 온 네 살 된 미카엘라가 중요한 질문이 있다고 했다. 어떤 질문이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눈을 내리깔고 작은 손만 만지작거리며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아이는 더듬거리며 “팬티…, 팬티…, 예수님은… 왜… 팬티만 입고 있어요?”라고 물었다. 아이의 눈에는 성당 제대 뒤의 커다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벌거벗은 예수님의 모습이 늘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나는 꼬마 친구의 질문에 바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그 또래의 아이가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난감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십자고상을 보았지만 왜 예수님께서 팬티만 입고 계시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님의 복장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다음 주일에 오면 답변을 해 주겠다며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주간에 동기 신부들에게 아이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이 별로 신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성서학자인 형님 신부님께 도움을 요청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날에 옷은 흔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옷이 귀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들의 겉옷뿐 아니라 속옷까지도 모두 벗겨 서로 나누어 가졌다(요한 19,23-24참조). 나쁜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벗겨 가지고 갔지만 오늘날 대분의 십자고상에서는 그래도 팬티 한 장은 걸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만난 꼬마 친구에게 위 답변에 몇 가지를 보태어 의기양양하게 예수님의 팬티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한참 동안 내 설명을 듣고 난 후, 아이는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추운데… 팬티만… 팬티만… 입은 예수님이… 불쌍해요. 예수님 위해서… 제가… 많이…많이… 기도할게요!”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예수님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면서 주님을 위해 많이 기도하겠다는 미카엘라를 바라보면서 왜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그토록 사랑하셨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 루이스 데브레 (Louis Derbre′), 십자고상, 1951년, 황동, 생 슐피스 성당, 파리, 프랑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