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12. 그늘 속의 사람, 정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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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0:19
하나는 죽고 둘은 귀양… 가문 지키려 아우 시신마저 거부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12. 그늘 속의 사람, 정약현
2020.07.26발행 [1574호]
▲ 정창섭 작 ‘성 정하상 바오로 가족’. 왼쪽부터 복자 정약종의 딸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부인 성녀 유소사 체칠리아, 아들 성 정하상 바오로.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
“배 건너요!”
2018년 6월 12일, 필자가 다산의 여유당이 자리한 마재로 다산의 먼 일가인 정규혁 바오로 선생댁을 찾았다. 평생을 마재에서 사신 분으로, 92세의 연세에도 기억이 맑고 말씀이 곧았다. 6·25전쟁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온 마을에 찢어진 한적(漢籍)이 바람에 낙엽처럼 뒹굴던 얘기부터, 중공군 장교 하나가 틈만 나면 옛집 다락에 올라가서 그 많은 책을 여러 날 읽고 갔더란 얘기를 들었다.
집안에 구전된 이야기도 있었다. 정약종이 사형당한 뒤 목 잘린 시신이 배에 실려 두미협을 올라왔다. 마재 건너편 배알미리에서 관 실은 배가 마재로 건너려고, 큰 소리로 “배 건너요!”하고 외쳤다. 시신 실은 배라서 그랬다. 그러자 강가에서 “안 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되돌아왔다. 완강한 저지에 막혀 배는 끝내 못 들어왔고, 그 다음 날도 들어올 수가 없었다. 단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산의 큰 형님인 정약현(丁若鉉, 1751~1821)이었다. 집안을 결딴낸 당사자의 시신을 고향 집으로는 절대 들일 수 없다는 결연함이 묻어 있었다. 결국, 정약종의 시신은 고향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배알미리 쪽에 묻혔다고 한다.
정규혁 선생 소유의 땅이 예전 배알미리 쪽에 있었다. 산자락에 봉분 비슷한 무덤 흔적 3개가 희미했다. 전부터 그중 하나는 머리 없는 무덤으로 불렀다. 인근의 한씨 집안 묫자리에서 묵주가 나왔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짚이는 것이 있어 1956년 또는 1957년경 이 무덤의 존재를 알렸고, 주교님과 정약종의 후손되는 두 분 신부님의 입회 아래 그곳을 팠다. 일요일과 월요일 이틀에 걸쳐 세 곳을 모두 팠는데 세 곳 모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파고 파도 흙뿐이어서, 무덤 자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첫날 두 무덤을 팔 때는 입회했고, 월요일은 출근 때문에 입회하지 못했다. 나중에 그곳을 정약종의 묘소로 인정하고, 그 흙을 담아 직계 후손이 살던 안산으로 이장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후 “배 건너요!” 하는 외침에, 강가에서 결연히 ‘안 돼!’를 외치던 정약현의 이미지가 내 안에 새겨졌다.
그 사이의 고초는 붓으로 적기 어렵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가산을 모두 적몰(籍沒) 당해 어쩔 수 없이 마재로 돌아온 정약종 일가가 고향 집에 와서 받았던 핍박에 대해 유독 자세히 적었다. 부친 생존 시에도 천주교 신앙을 엄금한 부친의 명을 거부하고, 정약종은 집안과 절연한 채 분원 쪽으로 이주했었다.
정약종이 사형당한 뒤 그의 모든 재산은 적몰되어 가족들은 지낼 곳조차 없었다. 달레의 기록에 따르면 “친척들은 죽기가 무서워 그들을 도와주는 것을 두려워” 했고, 정약종의 옛 친구 한 사람이 이들을 마재로 데려오자, 집안에서 이들을 차마 쫓아내지는 못하고 옹색하고 시련 많은 생활을 시작했다고 썼다. 그 옛 친구가 누구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거기서 가진 것도 없고 양식도 없이 버림을 받았는데, 다행히 어떤 상민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달레는 다시 이렇게 적었다. “아무 재산도 없어 마재에 있는 시아주버니댁으로 갔는데, 시아주버니는 그를 도와주기는커녕 집안에서 천만 가지로 핍박하였고, 극도의 빈궁 속에 신음하게 버려두었다. 맏딸은 얼마 가지 않아 죽었고, 순교자 정철상 가롤로의 아내와 아들도 죽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와 딸 정정혜 엘리사벳밖에 남지 않았다.”
1890년 홍콩 나자렛 수도원(納匝肋靜院)에서 펴낸 정하상의 「상재상서(上宰相書)」 앞에 실린 「재상에게 진술한 글을 쓴 정 바오로에 대하여(述宰相書丁保祿日記)」에서는 “그 사이의 고초는 한 붓으로는 다 기록하기가 어렵다(這間苦楚, 一筆難記.)”고만 썼다. 정약현을 중심으로, 가장을 유배지로 보낸 정약전과 정약용의 가족이 힘을 합쳐 정약종의 남은 식구를 원수처럼 배척하고 핍박하던 정황이 눈에 그릴 듯하다. 이들에게는 가문의 명줄이 달린 문제여서 그 핍박 또한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다산은 「계부가옹행장(季父稼翁行狀)」에서 막내 삼촌인 정재진(丁載進, 1740-1812)이 “화를 당한 집의 고아와 과부를 더욱 불쌍히 여겨, 집을 세내서 살게 하고, 때때로 급한 형편을 돌보아 주었다.(禍家孤寡, 尤愍恤之, 僦屋以居之, 以時周急.)”고 적고 있다.
달레의 책에는 이런 내용도 보인다. 어느 날 아내 유소사 체칠리아의 꿈에 정약종이 나타나 말했다. “내가 천국에 방이 여덟 개 딸린 집을 지었소. 그중 다섯은 찼는데, 나머지 세 방은 아직 빈 채로요. 비참한 생활을 잘 참아 견뎌, 무엇보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오.” 절대적 궁핍과 가문의 학대 속에 전처 소생의 딸과 정철상의 아내, 그리고 어린 아들마저 잃고 절망에 빠져있던 유 체칠리아는 이 꿈을 꾼 뒤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
마재 정씨 천주교 인맥의 꼭짓점
강가에 서서 아우의 시신 실은 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정약현은 배경 속 희미한 그늘에 숨어 있어서 좀체 그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과는 배다른 형제였다. 어머니 의령 남씨는 1751년 5월 6일 아들 약현을 낳고, 이듬해인 1752년 10월 24일에 세상을 떴다. 그는 두 살 젖먹이 때 어미를 잃고, 유모를 따라 외가에서 자랐다. 그의 조용한 성품은 이 같은 성장 과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우들은 형에 비해 항상 더 빛났다. 1789년 막내 다산이 28세에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하지만 맏형인 그는 6년 뒤 45세 나던 1795년 봄에야 진사시에 턱걸이로 합격했다. 이후 대과를 포기하고, 가문의 관리자로 살았다.
다산은 그런 큰 형에 대해 「선백씨진사공묘지명(先伯氏進士公墓誌銘)」에서 이렇게 썼다. “신유년(1801)의 화에 우리 형제 세 사람이 나란히 기이한 화에 걸려들어, 하나는 죽고 둘은 귀양 갔다. 공은 없는 듯이 물의(物議) 속에 들지 않고 우리 집안을 보전하고 제사를 받들었다. 온 세상이 모두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벼슬은 한 차례도 못한 채 마침내 초췌하게 세상을 떴다.”
대과에 급제한 정약전과 정약용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서 귀양을 갔고, 천주교 명도회 회장으로 활동한 정약종은 목이 잘려 형장에서 죽었다. 큰형인 그만 아무 벼슬도 하지 않고 신앙생활도 하지 않아 연루됨이 없이 집안을 지킬 수 있었다. 집안에 천주교 신앙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던 아버지 정재원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정약현은 대역부도에 몰려 폐족이 된 집안을 붙들어 지키려 안간힘을 썼다.
앞서 보았듯 정약현 자신이 신앙 활동을 한 자취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초기 천주교회의 기둥이 된 인물들이 모두 그의 그늘에서 나왔다. 우선 초기 교회의 리더 이벽은 정약현의 처남이었다.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에게 천주교를 심은 출발점이 바로 이벽이었다. 정약현은 딸 셋을 두었다. 맏딸 정난주(마리아, 1773~1838)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에게 시집갔다. 둘째 사위는 승지를 지낸 홍영관(洪永觀, 1777~?)이고, 셋째 사위가 홍낙민(洪樂敏, 루카, 1751~1801)의 아들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 1789~1840)이다. 홍재영은 신유박해 때 순교한 아버지 홍낙민을 이어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처남과 사돈이 초기 교회의 핵심 중 핵심이었다. 게다가 친동생 정약종은 천주교의 지도자였고, 누이는 조선교회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에게 시집갔다. 초기 가성직 교단의 신부였던 정약전 정약용에다 정약종의 아들 정철상과 정하상의 어머니 유소사 체칠리아와 그 딸 정정혜 엘리사벳까지 포함하면, 마재 정씨 집안의 천주교 인맥이 결코 단순치가 않다. 황사영이 결혼 후 처음으로 천주교 이야기를 들었다고 쓴 것을 보면, 정약현의 딸은 결혼 전에 이미 독실한 천주교도였던 듯하다. 그런 그가 교난(敎難)의 와중에서 유독 비켜갈 수 있었던 것은 천운에 가까웠다.
정약현이 정약종의 가족에게 가한 학대에 가까운 핍박은 어떻게든 잔명을 붙들어 가문을 유지하려는 안타까운 비원(悲願)처럼 여겨진다. 부친 서거 후 가뜩이나 옹색한 마당에다 망하정(望荷亭)을 세우고, 날마다 정자 위에 올라가 부친의 묘소가 있는 충주 하담(荷潭) 쪽을 바라보던 그의 자책 어린 아련한 눈길도 보인다.
그런 그의 거처에 다산은 유배지에서 「수오당기(守吾堂記)」를 지어 올렸다. 글에서 다산은 ‘나’를 굳게 지킨 형님에 비해, 나를 잃고 오래 딴 길을 헤맸던 자신을 반성했다. 정약전의 거처에 지어 올린 「매심재기(每心齋記)」에서는 ‘매심(每心)’ 즉 뉘우치는 마음(悔)을 토로하기도 했다. 집안을 중심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 천주 신앙이 온 집안과 조선 땅에 천주학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같은 정황을 말없이 배경에서 지켜보았을 정약현의 속내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