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61. 남대문과 중구 일대의 약국 주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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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1:14
서울에만 약국 9곳 등장… 초기 교회 연락 거점·집회 장소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1. 남대문과 중구 일대의 약국 주인들
2021.07.25발행 [1623호]
▲ 약국 또는 약방은 초기 교회 서학을 전파하는 주요 거점이었다. 서울 지역에서 천주교 지도자급 인물로 최창현, 최필공, 최필제, 손인원, 정인혁, 손경윤, 손경욱, 김계완, 허속 등 무려 9명의 약국 주인들이 포착된다. |
약값을 어찌 함부로 받겠습니까?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윤유일의 아버지 윤장(尹)은 최창현과의 관계를 따져 묻는 형조의 공초에, 그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설명했다. 4년 전인 1797년에 딸의 병 때문에 상경해서 최창현의 집안사람인 최가가 운영하는 약국에서 약을 지었다. 다른 곳에 비해 약값이 터무니없이 쌌으므로 윤장이 괴이하게 여겨 연유를 물었다. 함께 있던 최창현이 이렇게 대답했다. “천주께서 하늘에 계시면서 사람의 마음속 선악을 살피시니 약값을 어찌 함부로 받겠습니까?” 윤장은 그래서 최창현이 사학하는 사람인 줄을 알게 되어, 그와 사학에 대해 담론하였다고 하였다.
약국 또는 약방은 당시 서학을 전파하는 주요 거점이었다. 약계(藥契)라는 명칭으로도 불렀다. 아들 윤유일이 1795년 주문모 신부 실포 사건 당시 최인길, 지황 등과 함께 죽었으므로, 1797년 당시 윤장이 최창현의 존재를 모를 리는 없었다. 굳이 최가의 약국을 찾은 것도 이런 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최필제는 1793년 신여권이 자기 약국을 찾아와 약을 지을 때 말뜻이 보통 사람과 달라, 피차간에 허교하여 몇 차례 와서 보는 사이에 서학을 전하게 되었다고 「사학징의」에 실린 공초에서 말했다. 이 같은 장면은 천주교인인 약국 주인이 병으로 약국을 찾은 사람에게 좋은 약재를 대단히 싼 값에 공급해서 신뢰를 쌓고, 그 바탕 위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하는 정황을 잘 보여준다.
초기 교회에서 상시적 집회 공간을 마련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도회지의 특성상 사람들의 왕래가 많다고는 해도, 한 집에 수십 명이 계속해서 들락거릴 경우 대번에 이웃의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특별히 천주교도 검거령이 떨어진 상황 아래서 이 같은 모임의 운영은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집회 공간은 평소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서 출입이 특별히 남의 시선을 끌지 않을 곳이라야 했다. 또 자칫 밀정이 침투할 경우, 조직 전체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 간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약국은 이 같은 두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당시의 약국 또는 약방에서는 진맥과 침구, 조제까지 이루어지므로 오늘날의 병원과 약국을 합친 기능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놓인 가난한 사람들이 싼값에 좋은 약을 지어준다는 소문에 모여들었다. 또 몸을 괴롭히던 병이 나으면 의원에게 큰 은혜를 입는 것이어서 서로 간에 깊은 신뢰가 형성되곤 했다. 이렇게 해서 맺어진 신뢰에 종교적 신심이 보태질 때 그 결속력은 대단했다. 여주 감옥에서 뛰어난 의술로 명성을 날리고 포교 활동까지 했던 이중배 마르티노의 경우만 보더라도 의료 행위와 신앙 전파의 관련을 보게 된다.
양인 출신 의원 손경윤은 안국동과 관정동에서 약국을 운영했는데, 그는 굉장히 큰 집 한 채를 따로 마련해 바깥채에는 술집을 열고, 안채에 여러 개의 큰 방을 두어 천주교인들의 집회와 교리 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바깥쪽의 시끌벅적함으로 안채의 천주교 집회를 은폐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도 안되면 벽동의 정광수나 충훈부 후동 강완숙의 경우처럼 둘레의 집을 천주교인들이 입주하게 해서 한 구역 전체를 천주교인의 주거 구역으로 포위하는 방식을 쓰기도 했다.
초기 교회와 약국
약국 주인들은 이 같은 이유에서 초기 교회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기록을 통해 볼 때, 당시 서울 지역에서 천주교 지도자급 인물로 최창현, 최필공, 최필제, 손인원, 정인혁, 손경윤, 손경욱, 김계완, 허속 등 무려 9명의 약국 주인들이 포착된다. 이들은 서로 혈연으로 얽힌 일종의 약국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에 김종교, 김일호처럼 자신의 약국 없이 떠돌이로 의료 행위를 하던 사람이나 옥천희 같이 약재 판매를 빌미로 이들과 접촉한 이들까지 포함한다면, 범위가 더욱 확대된다. 말하자면 약국은 초기 교회 조직을 떠받치고 있던 중요한 축이었다.
이들 약국들이 대부분 오늘날 서대문구와 중구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우리의 흥미를 끈다. 최창현은 초전동(중구 초동), 최필공은 도저동(중구 도동), 최필제는 장흥동(중구 충무로 1가?), 손경윤은 관정동(중구 태평로 2가), 손경욱은 모화관(서대문구 영천동), 손경무는 회현동, 손인원은 남대문 밖 삼거리(중구 도동 인근), 김계완은 양대전동(서대문구 의주로 1가), 정인혁은 광통교(중구 남대문로 1가)에서 약국을 열고 있었다.
이들의 신분은 대부분 중인이었고, 이중 최필공과 김종교의 집안은 선대에 대궐에서 의관(醫官)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최필공과 최필제는 사촌 간이고, 정인혁은 최필공과 성이 다른 친척이었다. 손경윤과 손경욱은 형제간인데, 이중 손경욱은 최필공의 약국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이들 형제는 최필공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형제의 사촌 동생 손경무는 교계의 중요 인물 중 하나였던 현계흠의 사위로, 회현동 큰 거리에 장소를 마련해서 천주교 신자들과 집회를 가졌다고 했는데, 이 장소 또한 약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같은 손씨인 손인원과 손경욱과의 인척 관계는 분명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천주교인 고광성이 손인원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했고, 손경욱이 고광성의 바깥채에 약국을 열었다는 진술이 「사학징의」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들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허속은 최인철의 매부였다. 그의 조부 허수(許)는 왕실의 수의(首醫)에까지 올랐던 실력 있는 인물이었다. 양근 사람 김일호는 의술에 대한 조예로 서울과 지방의 사대부 집을 왕래하며 의료 행위를 했다. 그는 최필제의 집에 몸을 의탁하거나, 정인혁의 약국을 자주 드나들면서 서학에 깊이 빠져들게 된 인물이다.
양대전동에서 약국을 운영했던 김계완은 약국 주인 최필공을 통해 입교했고, 그는 약방을 운영하면서 교회 일도 깊이 관여해서, 홍필주가 충훈부 후동에 새 집을 마련할 때 황사영, 이취안과 함께 각자 돈 1백냥을 헌금하기도 했다. 「사학징의」 중 허속의 공초에 관정동(冠井洞)에 사는 최창현의 부친 최용운(崔龍雲)이 약값을 받으려고 자기 집을 찾아온 일을 말했는데, 약국 주인들 사이에 약재 거래를 통한 잦은 왕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연락 거점과 집회 장소
이렇듯 서울 시내 서대문구와 중구 쪽에 집중적으로 약국을 포진해 두고서, 이곳을 천주교 집회의 거점으로 삼았고, 이곳을 통해 집회 외에 교리서 번역 필사나 지방의 각 거점을 연결하는 연락망을 가동시킬 수 있었다. 이들은 약값을 받는다거나 약재의 구입 판매 및 치료를 구실로 지방까지 빈번한 왕래를 가졌다. 약방 안쪽에 마련한 공간에서는 주일마다 미사가 열리고, 시도 때도 없이 모여 교리 공부를 진행하였다.
양근 사람 김일호는 1799년 서울 이주 후에 사학을 배우기 위해 정인혁의 약국으로 찾아가서 「천주실의」를 빌려 보고 차츰 깊이 미혹되었다고 했다. 이후 그는 최필제의 집에 몸을 의탁했고, 황사영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곳도 정인혁의 약국에서였다. 변득중은 이용겸의 소개로 남대문 밖 손인원의 집을 찾았다가, 그곳에서 황사영과 만난 일을 진술했다. 약국에는 교계의 핵심 인물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었다.
「사학징의」에서는 최필제를 두고 “약국이라 이름을 내걸어 놓고 오가는 요망한 사람을 모아다가 남몰래 사학의 소굴로 만든 것이 오래 되었다. 계축년(1793) 이후로 다시 큰길거리에다 약국을 열었으니, 그 왕래하며 모인 곳과 아침저녁으로 강론한 것은 황사영과 손경윤의 무리였다”고 적었다.
신유박해의 신호탄
1800년 12월 19일 밤, 형조의 나졸들이 남대문 안쪽 장흥동 어귀 큰길 옆의 약국을 지날 때였다. 창안에서 문득 부절을 맞추는 소리가 났다. 투전판이 벌어진 것으로 짐작한 나졸들이 창을 밀치며 방안으로 순식간에 뛰어들었다. 방안에는 사람들이 여럿 모여있었는데, 분위기가 자못 묘했다. 좀 전에 들은 소리는 투전 패의 패짝을 던지는 소리가 아니라 그들이 제 가슴을 치면서 낸 소리였다. 아마도 미사 중에 ‘내 탓이오’를 외치며 낸 소리였을 것이다.
이날은 성헌당(聖獻堂) 첨례일, 즉 주님 봉헌 축일이었다. 몸을 뒤지자 투전 패는 안 나오고 첨례단자 한 장이 나왔다. 나졸 중에 글자를 아는 자가 없어, 이를 압수해 형조로 가져가 바친 뒤에야 그 종이가 천주교의 축일을 적은 축일표인 줄을 알았다. 즉각 다시 출동해서 검거에 나섰지만, 자리에 있던 자들은 모두 달아나고 최필제와 오현달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이곳은 아마도 최필제가 운영하던 약국이었을 것이다.
이날 이들의 체포는 1800년 6월 정조의 급작스런 서거 이후 국상으로 인해 근 반년 동안 일체의 종교 탄압이 중단되었던 상태에서, 박해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7월 이후 여성들이 겁도 없이 밤중에 불을 밝히고 거리를 쏘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최창현 등 교계 중심인물들이 잇달아 검거되면서 좌우 포도청이 체포된 천주교도들로 가득 차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해가 바뀌면서 1월 11일 대왕대비가 오가작통법의 시행과 함께 토사반교(討邪頒敎)를 내렸고, 2월 12일 정약종의 문서가 검거되면서 신유박해의 참혹한 살육이 시작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