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숨은 이야기] 66. 황사영은 역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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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7 21:21
광적인 종교 탄압에 맞서 오로지 천주 섬기는 자유 청원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6. 황사영은 역적인가?
2021.09.05발행 [1628호]
▲ 황사영 백서. 가로 62㎝, 세로 38㎝의 명주천에 깨알 같이 적어나간 글은 글자 수만 1만 3384자에 달한다. |
1㎝에 세 글자씩 쓴 1만 3384자
황심은 8월 23일 서울로 왔다가 이튿날 제천으로 떠났다. 그는 아마 8월 26일경에 배론에 도착했을 것이다. 황심의 제천행은 황사영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간의 교회 소식을 전했다.
황사영은 자신이 그간 토굴 속에서 준비한 종이에 쓴 백서의 초고를 황심에게 보여주었다.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행차 편에 북경 주교에게 전달할 글이었다. 황심을 통해 신부의 최후에 대한 전언을 들은 황사영은 보완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황심이 말미를 두고 다시 오겠다며 길을 떠났다. 황사영은 내용을 추가해 초고를 완성한 뒤, 이를 명주천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가로 62㎝, 세로 38㎝의 올이 가는 명주천에 한 글자의 오자 없이 깨알 같이 적어나간 글은 글자 수만 1만 3384자였다. 38㎝ 길이의 천에 한 줄에 96자에서 124자에 달하는 글자로 122행을 썼다.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1㎝ 안에 세 글자가량 써야 하는 크기다. 옷 속에 넣어 꿰매야 했기에 부피 때문에라도 글씨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백서는 9월 22일에 완성되었다. 그런데 9월 25일에 황심이 돌연 체포되었고, 그가 황사영이 숨은 곳을 알리는 바람에 은신 8개월 만인 9월 29일에 제천 토굴에서 체포되었다. 백서가 그의 품속에서 나왔다. 백서를 본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앞쪽은 자신들이 조선 정부에 의해 어떤 탄압을 받았는지를 적었고, 이미 죽은 순교자들의 전기를 하나하나 기술하고 있었다. 문제는 글의 맨 끝쪽에 있었다.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게 요청한 사항 중, 교황이 중국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조선 국왕을 협박하고, 청나라가 조선을 부마의 나라로 삼아 내정을 감호(監護), 즉 감독 보호해달라는 요청, 수천 척의 서양 선박에 수만 명의 군대를 끌고 와서 조선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박해 달라는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이 편지로 인해 천주교도는 이전 무부무군(無父無君)의 패륜멸상(悖倫滅常)의 무리에서 순식간에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역모 집단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것은 두고두고 천주교 박해의 근거가 되었다.
가백서(假帛書)와 가짜 논란
조정은 황사영을 문초하는 중에 동지사가 북경으로 출발하게 되자, 10월 27일 대제학 이만수(1752~1820)를 시켜 황제께 올릴 「토사주문(討邪奏文)」을 작성케 했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을 황사영의 검거에서 나온 백서와 맞물려 정면 돌파하려고 했다. 주문모를 조선 사람인 줄 알고 죽였는데, 뒤늦게 황사영의 백서로 인해 그가 중국 사람임을 알았다면서, 두루뭉수리로 얼버무렸다. 증거 자료로 황사영의 백서 중에 조선 정부에 유리한 내용만 발췌해서 1만 3384자를 고작 16행 923자로 축약해 흰 비단에 옮겨 적어 증거자료로 첨부했다. 이때 맥락 없이 입맛에 맞게 임의로 줄인 백서가 후대에 논란을 빚은 가백서(假帛書)다.
▲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황사영백서입수전말의기록>. 황사영 백서는 1801년 압수된 이후 줄곧 의금부에 보관돼 오다가 1894년 뮈텔 주교가 입수했다. 이를 1925년 79위 순교자 시복식 때 교황청에 전달했다는 일련의 기록을 담고 있다. |
원본 백서는 의금부 비밀 창고에 들어가 봉인되었다가, 1894년 갑오경장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서 의금부와 포도청에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를 소각 처리할 때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담당 관리가 폐기 직전 천주교 신자 친구인 이건영(李健榮)에게 원본을 건넸고, 이건영이 이를 당시 조선 교구장이던 뮈텔(Muttel, 1854~1933) 주교에게 바쳤다. 뮈텔 주교는 이를 다시 1925년 로마 바티칸에서 거행된 조선 천주교 순교자 79위 시복식 당시에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해, 현재 바티칸 민속박물관에 원본이 소장되었다.
「벽위편」을 증보할 때 이만채는 「사영백서(嗣永帛書)」를 실으면서 등출 경위를 적고 나서 이렇게 썼다. “조금 오래되자 사학하는 무리들이 ‘이것은 홍희운이 가짜로 지은 것’이라고 떠들어대어, 당시 재상 중에도 간혹 이 말을 듣고 믿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해년(1839)에 사학을 다스릴 때 그 글이 다시 드러나 윤음과 보감(寶鑑)에 올랐다. 이로부터 사학하는 무리가 마침내 감히 다시 이 같은 주장을 하지 못하였다.”
황사영의 청원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고, 특별히 중국에 보낸 가백서의 경우는 앞뒤 맥락이 다 빠진 상태에서 극단적 주장 내용만 도드라지게 편집한 것이어서, 천주교 신자들뿐 아니라, 조정 관료들까지도 의구심을 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원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의심도 무리는 아니었다.
거기에다 원본을 베껴 쓰는 과정에서 악의적 왜곡도 끼어들었다. 예를 들어 백서 68행에서 강완숙에 대한 주문모 신부의 신뢰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신부가 총애하여 맡김이 몹시 대단해서 달리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神父寵任甚隆, 無人可擬)”라 한 것을 “신부가 총애하여 맡김이 몹시 대단해서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神父寵任甚隆, 無人不疑)”고 바꿔 놓아,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남녀 관계가 있었던 듯한 뉘앙스를 풍겨 놓은 것이 한 가지 예이다.
또 102행에서 “천주의 인자하심으로 오히려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같이 잔혹하게 부서진 가운데서도 다만 한 줄기 길을 남기셨으니, 분명 동국을 기꺼이 구원하시려는 드러난 증거와 닿아 있습니다(主之仁慈, 猶未全棄, 似此殘破之中, 特留一線之路, 明係肯救東國之表證)”라고 한 것을 왜곡하여 “분명 동국을 배교케 하려는 드러난 증거와 닿아있다(明係背敎東國之表證)”고 바꿔 놓는 등 군데군데 예민한 대목에서 말을 줄이거나 글자를 교체한 자취가 여러 곳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진천 신부의 「황사영 백서 이본에 대한 비교 연구」에 상세한 분석이 있어 여기에 미룬다.)
「토역반교문」 속 3가지 흉계
12월 22일에 대비는 다시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발표했다. 이글 또한 앞서 중국에 보낸 「토사주문」을 썼던 이만수가 지었다. 글 속에 황사영에 대한 내용이 짧지 않다. 글은 “이리의 심보에다 여우의 낯짝이라. 도성에서 사주 보며 부적으로 오래도록 이름이 있더니, 천진(天津) 저녁 볕에 감히 초개 같은 목숨 구해 달아났구나. 한 조각 흰 비단에 쓴 편지가 나오니, 세 조목의 흉악한 계책을 꾸몄다네. 차마 3백 개 고을, 명교(名敎)의 고장에다 문을 열어 도적을 받아들이고, 9만 리 큰 바다의 선박을 불러들여 날을 정해 지경을 범하려 했지. 배척하여 꾸짖어 욕함은 역적 정약종보다 1백 배나 더하고, 교통하여 서로 오간 것은 역적 황심과 한 통속이었다네.”
예의(禮義) 동방에 도적을 받아들이고, 서양 선박을 불러들여 우리나라를 치게 한 것을 이리의 심보에 여우의 낯짝이라 하고, 그 죄가 역적 정약종의 1백 배쯤 된다고 적은 것에서 그를 향한 조정의 분노가 느껴진다. 한편 글 속에서는 ‘삼조흉계(三條凶計)’가 유난히 눈에 걸린다. 그것은 첫째, 황제의 뜻으로 글을 내려 조선 정부가 서양인을 받아들이게 해달라는 것과 둘째 안주(安州)에 무안사(撫安司)를 열어 친왕(親王)이 조선을 감호(監護)케 하는 방안, 셋째, 서양국과 통하여 큰 배 수백 척에 정병 5, 6만을 태우고 대포 등의 병기를 싣고 와 종교의 자유를 허락게 하라는 세 가지를 꼽은 것이다. 「순조실록」 1801년 10월 6일 자 기사에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한 세밀한 검토와 평가는 이 짧은 글에서 자세하게 논의하기 어렵다. 다만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던 대박청래(大舶請來)에 대한 논의는 사실 황사영이 처음 꺼낸 얘기가 아니다. 1796년 주문모 신부가 북경에 보낸 편지에서 최초로 나오고, 이는 유항검ㆍ유관검 형제의 공초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또 그 바탕에는 조선 후기 미륵하생 신앙이 「정감록」 신앙과 결합되어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로 확장되던 민간 신앙이 서학과 습합되는 별도의 긴 서사가 잠재되어 있다. 이 부분은 따로 떼어 살펴보겠다.
당시 유럽 교회는 1789년 발생한 프랑스 혁명 이후 교황의 권위는 추락했고, 국가 교회의 개념이 확산되어 국가가 교회권 위에 군림하던 시기였다. 당시 교황 비오 6세(재임 1775~1799)는 프랑스에 감금된 상태로 서거하였고, 나폴레옹의 권력이 확대되면서 교황권은 추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를 이은 비오 7세 교황(재임 1800~1823)은 유럽 자체의 문제를 감당해나가기도 벅찬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유럽에서 9만 리를 항해하여 몇천 척의 배와 수만 명의 군대를 조선에 보내 조선 국왕을 겁박해 종교의 자유를 얻도록 해달라는 조선 교회의 거듭된 청원은 참으로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이를 두고 다블뤼 주교조차도 「조선순교자 역사비망기」에서 백서의 뒷부분이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하지 못한 결과 너무 경솔하게 앞서간 부분이 있었고, 말에 조심성이 너무 없어, 천주교 적대자들과 노론 세력에 대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표현이란 생각마저 든다고 지적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상황 판단에 적절치 못한 부분이 있었다 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국가의 위에 두었던 이들의 순진한 신심을 덮어놓고 폄훼할 일은 아니다. 황사영은 단지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종교에 대한 광적인 폭압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오로지 자유로 천주를 섬기는 권리를 존중받게 해달라고 청원했던 것이었다. 당시 세계사의 현장적 전망을 갖지 못했던 조선의 지식인이 꿈꾼 천주와 교황의 권능은 9만 리의 거리가 문제 될 수 없었다.
황사영은 토사반교가 반포된 뒤인 11월 5일에 처형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가 죽을 당시의 정황은 남은 기록이 없다. 당시는 모든 조직이 멸절되어 입회할 사람도 기록할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사영의 처형으로 조선 정부는 신유년 옥사의 실제적 종결을 선언했다. 처벌받은 자들의 재심청구권도 금지했다. 새 왕은 보위에 오른 직후에 너무 많은 피를 보았다. 황사영을 마지막으로 주모자급이 모두 처형되었다는 판단이어서, 확실한 국면 전환이 필요했다.